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일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선비 – 수암(漱菴) 채지면(蔡之沔)

빛마당 2019. 4. 4. 20:13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일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선비 – 수암(漱菴) 채지면(蔡之沔)

곽 희 상
 
“예야, 점심에는 쇠고기가 먹고 싶구나”

라고, 어머니는 간신히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매우 적적해 하시다가 급기야 몸져 누우셨다.

 “이를 어찌할꼬, 이를 어찌할꼬 ……” 

어머니께서 쇠고기를 드시고 싶어 하는데 ……
아들은 기로에 섰다.
사실, 어머니의 병환이 육류를 드시면 크게 해로운 병(病)이었으니,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저러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나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다. 그렇다고 쇠고기를 드리면 병환이 더욱 깊어져 오히려 영영 못 일어 날 수 밖에 없는데 ……
병이나면 몸에 해로운 음식만 찾는다고 하던데 ……
소년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생가 4종조부께서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후일 효종)과 함께 심양을 다녀오신 우담 우담(雩潭)은, 채득기(蔡得沂, 1605∼1646)의 호이다.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학정(鶴汀)으로, 학문이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천문·지리·복서·음률·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란 때 창의한 유종(有終, 선조 어의)의 아들로 침술에 특히 능하였다. 유일(遺逸)로 빙고별제(氷庫別提, 정6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심양(瀋陽)에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을 호종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어겨 보은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풀려나 봉산별곡(鳳山別曲)을 짓고 심양에 가서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모셨다. 1645년에 세자 일행을 모시고 환국하자 경천대(擎天臺)에 들어가,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둔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執義, 종3품)에 추증되었다. 존애원의 초대 주치의인 청죽 성람(1556〜1620)의 아들인 한산군수 성여춘(成汝櫄)이 매부이다.
 할아버지가 아니시던가.
자고 나면 병환을 여쭙고 다시 처방을 받으면서, 당부 말씀에,

 “쇠고기를 비롯하여 육류는 금해야 하느니라”

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기에, 홀로된 어머니를 위해 사랑과 공경을 다 하였고 온정(溫凊) 온정(溫凊)은,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함.
과 수수(滫瀡) 수수(滫瀡)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을 말함.
에 있어서도 곡진하게 마음을 다 하였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셔 왔건만 급기야 하늘을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드디어 결정을 하였다. 쇠고기를 드려도 병환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은 뻔한 이치이니 거짓말을 하기로 ……

 “어머니! 제가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는데, 소를 잡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소를 잡는 곳이 있으면 그때 제가 소고기를 맛있게 요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방을 빠져 나오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소년은 이 이후로 평생동안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진사(進士) 채공(蔡公) 지면(之沔)의 묘표(墓表)’의 내용을 참고하였음. 


  이 소년이 바로 효자 수암(漱菴) 채지면(蔡之沔, 1639∼1689) 공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한경(漢卿)이고 수암(漱菴)은 공의 호이다.
  관향은 인천(仁川)인데, 문장과 풍절(風節)로 성종(成宗)ㆍ중종(中宗) 두 조정에 걸쳐 명성을 드날린 대사헌 양정공(襄靖公) 난재(懶齋) 수(壽, 1449∼1515)가 공(公)의 6대조인데,『홍길동전』보다 100여 년이 앞서 창작된 최초의 국문본 소설인『설공찬전』을 지었다. 5대조는 소감공 진사(進士) 윤권(胤權, 1472∼1503)이다. 아우인 소권(紹權, 1480∼1548)은 부친의 문장을 이어받아 조선조 최초로 화왕계계(花王戒系) 소설인『화왕전(花王傳)』을 지었다. 고조부는 무휼(無恤, 1510∼?)이고, 증조부는 좌승지에 추증된 유근(有根)이다. 조부는 휘가 홍(泓)으로 호조참판 인양군(仁陽君)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휘 몽정(夢井)은 부사과(副司果)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김장생(金長生, 1548∼1631)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고, 공조참의에 올랐다.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선생을 사사하였으며,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金氏)인데 그의 아버지는 학생(學生) 후생(厚生)이다.

  가계는 다음과 같다.
【가계도】

 

13世                 
                          신보(申保)

               ┌─────┴───┬─────┐
        14世 수(壽)                  년(年)        재(載)

               ├─────┬─────┐
  15세  윤권(胤權)   소권(紹權)    승권(承權)

               ├─────┬─────┐ 
  16세  무휼(無恤)   무일(無逸)   무적(無敵)

               │
  17세  유근(有根)
               │
       18세 홍(泓)

               │
  19세 몽정(夢井) 
               │
  20세 지면(之沔)
  


  공(公)은 어려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백원(百源) 신석번(申錫蕃, 1596∼1675) 등에게 사사(師事) 받았다.
  공(公)의 아버지가 태몽(胎夢)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구만(九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공(公)은 독서를 좋아하여 자고 먹기를 잊을 정도였는데, 겨우 약관이 되었을 때부터 의젓하여 노성(老成)하다는 칭호가 붙었다.
  1677년(숙종 3) 정사년 증광 별시(增廣別試)에 합격하였으나 그 시험이 무효가 되어 버렸다. 42세인 1681년(숙종 7)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三等) 22위(52/100)에 들었으며, 그리고 1684년(숙종 10년) 갑자년 별과(別科)에도 제9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상신(相臣, 3정승)의 건의로 1등의 합격자만 인정하고 그 나머지는 제외시켰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국조인물고』,「채지면 묘표」, 1999.
 이렇듯 과거(科擧)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인 을축년(乙丑年)에 장원 별검(掌苑別檢, 종8품)에 추천되었으나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누차 공의 학행(學行)을 추천하였으나 끝내는 불우하게 되고 말았다.
  공은 평소에 어머니를 잘 섬겨 사랑과 공경을 다 하였고, 온정(溫凊)과 수수(滫瀡) 수수(滫瀡)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을 말함.
에 있어서도 곡진하게 마음을 다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몸에서 최질(衰絰) 최질(衰絰)은, 상복(喪服)을 말함.
을 벗은 일이 없고 발이 중문(中門)에 들어간 일 없이 3년을 하루와 같이 보냈으며, 어머니가 앓고 있을 당시에 쇠고기를 들고 싶어 했으나 병에 해로울까 봐 즉시 드리지 못했다 하여 일생동안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기도 하였다. 제사 때면 반드시 정성껏 신중을 기하여 제기 씻는 일에서 제찬 장만하는 일까지 모두 직접 간여하였다.
  공(公)은 학문은 일찍부터 율곡 이이(李珥)의 학맥을 잇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제자이면서, 영남에서 기호학을 연마한 백원(百源) 신석번(申錫蕃)을 스승으로 모셨다.
  특히 백원 선생은 어릴 때에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이목(李楘, 1572∼1646)에게 수학하였고, 윤증『명재유고(明齋遺稿)』(권38)「사헌부장령 증이조참의 신공묘갈명」
 성장을 하여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종학(從學)하였고 김학수,「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한국사학) 박사학위논문, 2007, p.275.
, 또한 우연(愚淵) 김지복(金知復, 1568∼1635)의 문하생이다. 그리고 당대에 도의 교유한 쌍수당(雙修堂) 김삼락(金三樂, 1610∼1666), 화은(華隱) 성진항(成震恒, 1609∼1666) 등과 학문을 강마하였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흠모한 대 학자였다.
  따라서 공(公)의 학문은 영남학(嶺南學)과 기호학(畿湖學)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학문하는 방법을 얻어 듣고 의심되는 곳을 강질(講質)하여 정밀하게 연찬을 가하였다. 특히 창녕 성씨(昌寧成氏)와의 혼맥은 생가 5종조부인 지헌(之軒) 유종(有終, 1561∼1606)이 청리 율리 소재 존애원(存愛院)의 초대 주치의였던 청죽(聽竹) 성람(成灠, 1556∼1620)과 사돈지간으로 청죽의 아들 여춘(汝櫄)이 유종의 사위이고, 함께 학문을 강마한 화은(華隱) 성진항(成震恒)은 청죽의 손자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유하면서 학문을 토론하였으니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겠다.
  과거(科擧)와 출사(出仕)에 운이 따르지 않자, 수석(水石) 좋은 선세(先世)의 옛터에다 두어 칸 집을 지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우암(尤菴) 선생이 손수 수암(漱菴)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문 위에 걸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公)의 호(號)이다.
  35세인 1674년(현종 15, 갑인)에는 2차 예송, 즉 갑인예송(甲寅禮訟) 제2차 예송은,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부인인 인선 왕후(현종의 어머니)가 서거하자 남인인 윤휴·허목 등은 인선 왕후를 첫째 며느리로 대우하여 상복 1년을, 서인에서는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은 실권되었다.
이 일어나 서인이 남인에게 패배하여 우암은 좌의정에서 실각을 당하면서 덕원으로 유배된다. 다음 해인 1675년(숙종 1, 을묘)에는 현종(顯宗)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숙종(肅宗)이 즉위한 해이다. 이 해에 우암은 다시 봉산(蓬山)으로 귀양을 가자 공(公)이 달려가서 문안을 드리고는 시(詩) 1수를 올렸는데, 그 시에,

人多繼祖詛(인다계조저)  사람들은 많이들 계조 계조(繼祖)는, 송 영종(宋寧宗) 때 감찰어사(監察御史)였던 심계조(沈繼祖)를 말하는데, 주희(朱熹)에게 열 가지 죄가 있다고 왕에게 모함하였다.《송사(宋史) 심계조열전(沈繼祖列傳)》(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국조인물고』,「채지면 묘표」)
처럼 헐뜯는데
誰嘔文仲血(수구문중혈)  피를 토한 문중 피를 토한 문중 : 문중은 송 철종(宋哲宗) 때의 공문중(孔文仲)을 말함. 일찍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있을 때 소인들의 꾀임을 받아 정이천(程伊川)을 탄핵한 일이 있었는데, 늦게서야 기만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분에 차 피를 토하면서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송원학안(宋元學案)》(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국조인물고』,「채지면 묘표」)
을 닮을 자는 누구인가.
萬古照心事(만고조심사)  만고를 두고두고 이내 심사 비쳐 줄
中天有日月(중천유일월)  저 하늘 복판에 해가 있고 달이 있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국조인물고』,「채지면 묘표」번역문.


라고, 읊었다.
  위의 시에서 공(公)은 스승을 달(月)에 비유하여 제자로서 존경함을 스스럼없이 나타내었다. 이에 우암 선생이 보고 나서 치지(致知) 존양(存養)에 관한 요긴한 말들을 써서 주기도 하였다.
  일찍이 대소(大疏)를 작성하여 화를 꾸며 낸 소인들의 정상을 낱낱이 말하였다가 무슨 일이 있어 올리지 못하였는데, 진사 채하징(蔡河徵)이 상소를 올려 선생을 구하다가 멀리 북새(北塞)로 귀양 갈 때는 공(公)이 시로써 그의 의기를 드러내면서 말까지 팔아 노자로 주기도 하였다.
  평상시 몸과 마음이 가지런하고 안정 장엄하여 생각하지 않고 말하거나 표정을 금방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세리(勢利)나 분화(芬華)는 관심 밖이었다. 글을 볼 때는 반드시 이치를 깊이 탐구하였고 염락(濂洛) 염락(濂洛)은,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 성리학을 말함.
의 서책들을 매우 좋아했으며, 더욱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주력하여 입심(立心) 행기(行己)에 필요한 것들을 골라 뽑아 약람(約覽)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退溪)ㆍ율곡(栗谷)의 저서를 가장 즐겨 마치 신명(神明)처럼 존경하였다. 문장을 쓰면서는 다듬기를 일삼지 않아도 그대로 법도가 있었다.
  필체도 획이 씩씩하고 힘이 찼지만 그것을 자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학도들이 배우러 오면 세밀한 곳까지 정밀하게 분석하여 상대의 역량에 맞게 가르침으로써 반드시 이룬 것이 있도록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는 성실하고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와 함께 장점은 칭찬을 잘 하면서 단점은 나쁘다고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소(親疎) 귀천(貴賤)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존경하였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국역국조인물고』,「채지면 묘표」번역문.

  저서로는『수암유집(漱菴遺集)』이 있는데, 2권 1책으로 석인본(石印本)이다. 아들 사휴(士休)가 편집하고, 1934년 8대손 기덕(基德)이 간행하였는데, 권두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서문과 권말에 기덕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 1」에는 시 81수, 만사 16수, 부(賦) 4편, 책(策) 1편,「권 2」에는 서(書) 1편, 서(序) 4편, 잡저 2편, 제문 2편, 부록으로 행장·묘표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수암유집」, 1996, 230-231쪽.

  특히,「권 2」에서 서(書)의「상동춘당문목(上同春堂問目)」은 예의 시행에 있어서 미비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불천주(不遷主)·우졸곡(虞卒哭)·시제(時祭)·고이성(告利成) 등에 대하여 송준길(宋浚吉)에게 가르침을 구한 글이다.
  1672년(현종 13)에 공(公)이 질문한 내용 중에,

 “〔문〕오늘날 세속에서는 제사 때 끓인 물에 밥을 조금 말아서 올리고서 그 그릇에 숟가락을 담그는데, 이는 예에 전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퇴계가 정 한강(鄭寒岡, 1543∼1620) 정 한강(鄭寒岡)은 정구(鄭逑, 1543∼1620)를 말한다. 한강(寒岡)은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이다. 13세에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우고, 그 후에는 이황(李滉), 1566년에는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에게 보낸 답서에 ‘지금 사람들이 끓인 물을 올리는 것은 옛사람이 차를 올리던 뜻이다.……’라고 하고, 밥을 말고 숟가락을 담그는 등의 일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시속을 따르는 것이 무방합니까?”“問 今俗祭時 進湯水和飯少許 仍置匙於湯器 此則於禮無據 但退溪答鄭寒岡 今人進湯水 是古人進茶之意云云 而不言和飯置匙等事 此亦從俗爲之 無妨否”(『동춘당선생별집』(권 6)「사우강론」채지면 조.


라고, 질문을 올리자,

 “〔답〕밥을 말고 숟가락을 담그는 일은 예에 말하지 않은 바이네. 그러므로 세속에 그렇게 하는 자가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네. 우리 집은 그렇게 하지 않네만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큰 해는 없을 것 같네.”“和飯置匙等事 禮所不言 故俗有爲之者 亦有不爲者 吾家則不爲也 雖爲之 恐無大妨”(『동춘당선생별집』(권 6) 위의 책 참조)


라고, 답하였다.
  이 밖에도「거저잡록서(居諸雜錄序)」와「반유록서(頖遊錄序)」가 있는데 저자의 수려한 문장력이 잘 나타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책 230-231쪽.

  향리에서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였지만 끝내 불우(不遇)하게 되고 말았다. 이에 묘표(墓表)를 지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는,

 “재질과 학문은 일찍이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종사하였으니 그 성취된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요. 그러나 운수가 기박하고 수명이 짧아 숲 아래에서 육침(陸沉)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천도(天道)란 말인가.”“嗚呼 以公之才學 早從事於大賢之門 其所成就 何可量也 而數奇壽嗇 終於陸沈林下 是何天道也”(권상하 찬, 채지면 묘표)


라고, 애도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 3월 1일에 병환이나 율림(栗林)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1세였다.
  공(公)의 배위는 교하 노씨(交河盧氏)로, 영의정 사신(思愼)의 후예이고 부사용(副司勇) 원(瑗)의 딸이다. 슬하에는 아들이 둘인데 맏이 징휴(徵休)이고 다음이 징래(徵來)이나 일찍 죽었으며, 세 딸은 곽수병(郭守炳)ㆍ하자곤(河自崑)ㆍ김홍정(金弘鼎)에게 각각 시집갔다.
  동서(東西)를 넘나들며 숱하게 배워 온 학문을 다 펴보지도 못한 채……
애 닯기가 한이 없도다.

【참고문헌】

1.『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2.『조선인명사전(朝鮮人名辭書)』
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상주시사(尙州市史)』
5.『국역국조인물고』, 「채지면 묘표」
6.『수암유집(漱菴遺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