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의

빛마당 2019. 4. 4. 20:18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의 뜻 깊은 언지(言志)

금 중 현

*  이 글은『愚軒先生文集』을 상고하였고,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한 1999년도『尙州文化 제8호』에 권태을의「우헌 채헌징의 설(說) 소고」와 2000년도『尙州文化 제9호』에 김자상의「우헌 채헌징의 시문고」등에서 일부 전사하였다.

     

  우헌 채헌징(1648, 인조 26 ~ 1726, 영조 2)은 18세기 초엽까지 활약한 목민관이요 학문과 문장을 겸전한 선비였다. 벼슬길에는 선정을 베풀었고 학자로서는 흥학육영(興學育英)을 자기의 책무로 여겼으며 문장에는 그 재능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 말기 영남의 큰 선비로 이름난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 영조 14~1816, 순조 16, 우복 정경세의 6대손)는 우헌이 남긴 문집의 서문에 이르기를,

 “공자는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의 말에는 반드시 들을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공이 남긴 글을 읽어보면 모두가 가슴에서 울어 나온 말이고 처음부터 화려함에 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유연하고 아름답고 사리에 맞으며 충후(忠厚)하고 관대한 기상은 또한 볼만한 것이 있으며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 믿어지므로 후세에 전하여 질 것이 의심할 바 없다.”

라고 라여 그의 문장력과 인간됨을 칭찬하였다.
  채헌징의 자는 문수(文叟)요, 호는 우헌 또는 여물헌(與物軒)이니 상주 이안에 세거하는 인천 채씨 난재(懶齋) 채수(蔡壽)의 8세 손이며 조선 중종 년간에 문신이었던 채무일(蔡無逸) 채수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정국공신으로 인천군에 녹봉을 받았으며 조선 최초의 한글본 소설인『설공찬전』을 저술하였다. 채무일(1496, 연산군 2 ~ 1546 명종 1)의 자는 거경(居敬), 호는 일계(逸溪), 인천 채씨 채수의 손자로 문과에 올라 정언과 좌랑을 역임하였고 뛰어난 화가로 중종의 화상(畫像)을 그렸으며 채수와 함께 함창의 임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의 10세 손이다.
  18세에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홍여하(1620, 광해군 12∼1674, 현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계이고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이며 대사간 홍호(洪鎬)의 아들로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의 문인으로 문과에 올라 2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32세에는 문과에 올라 사헌부 장령과 사간언 정언 그리고 진주 목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0세 쯤에 이웃 어른을 찾아갔다가 책상에서『맹자』한 질을 보고 그 제목을 모두 써 놓아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경전과 문장에 뛰어나 서당이나 고을의 문회(文會)에서 번번히 장원을 하여 문인(文人)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병조좌랑때는 경연(經筵) 경연 :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에 나아가 강(講)을 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으며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을 때는 엄격한 직무 수행으로 왕으로부터『통감(通鑑)』한 부를 하사받기도 하였고 진주목사 재임 중에는 촉석루(矗石樓)를 중수하고 충신묘(忠臣廟)의 제향 의식을 개정하였다.
  55세에 인동부사 때는 괴변(怪變)으로 퇴폐한 관사를 수리하여 거처하면서 요괴(妖怪)의 변을 진정시키고 영해부사 시절에는 과시(科試)를 시행하여 지방의 학문을 일으키는 일에 힘썼다.
  57세가 되던 1705(숙종 31)에는 신안서당(新安書堂) 신안서당 : 공검면 예주리에 있는 전통서당으로 처음에는 증거서당(曾居書堂)이라고 하다가 숭안서당(崇安書堂)으로, 숭안서당에서 신안서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721~1905년까지의 기사(記事)를 보존하고 있다. 창설년도는 미상이다. 김정찬 논문, 2016년,『尙州文化』제 26호「신안서당의 주요기사」
을 옮겨 중수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 이듬 해에는 큰형님을 한 집에 모셔 죽는 날까지 공경하였으며 고을의 선비들과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음주례 : 향촌의 선비·유생들이 향교·서원 등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主賓)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의례(鄕村儀禮)의 하나로 어진 이를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데 뜻을 두고 읍양(揖讓)하는 예절을 지키며 주연(酒宴)을 함께 하고 계(戒)를 고했던 행사다.
를 본떠 계를 조직하여 향풍 쇄신을 도모하였다.
  61세에 영해부사로 재임할 당시에는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과 서신을 왕복하면서 학문을 질의 응답하였다.
  68세에는 조령 이남의 수학궁으로 세칭하는 도남서원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존경받는 고을의 어른으로서 흥학육영(興學育英)에 힘썼다.
  72세에는 통정대부 부제학(副提學)으로 기로소(耆老所) 기로소 :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로 ‘기(耆)’는 연고후덕(年高厚德)의 뜻을 지녀 나이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기소(耆所)’ 또는 ‘기사(耆社)’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경로당과 같은 친목기구의 성격을 띠었다가 1765년(영조 41)부터 독립관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왕도 참여했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에 들었고 79세를 일기로 작고한 후 3년(1729)에 제자인 이덕겸(李德謙)이 그의 언행록(言行錄)을 남겼다. 이상 우헌의 행략은 앞의 각주1) 권태을의 논문에서 발췌함

  우헌 채헌징이 남긴 글은 그 언지(言志)의 구상(構想)이 뛰어나서 옛적 중국의 시전풍아(詩傳風雅)를 따라 하는 듯 하고 비록 화려하지 않으나 스스로 잘 읽으면 모두 유덕한 말임을 알게 하여 가히 스승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하였다. 앞의 각주 1) 김자상의 논문 ‘저술’ 조목에서 발췌함
 
  어느 해 조 선추(趙善推, 조는 姓이고 선추는 字이다.)라는 사람이 여름 공부를 하기 위하여 우헌의 이웃 집에 와 있을 때 ‘선추(善推)’라는 자를 ‘가행(可行)’으로 고치기를 조언하거늘 조공이 이를 수용하였다.
  가행(可行)으로 고치면 좋겠다는 설문(說文)으로「조선추개자가행설(趙善推改字可行說)」을 남겼는데 이에 이르기를,

 “내가 벗의 자(字)에 대한 뜻을 물으며 말하기를,
추기(推己, 자기 마음으로서 남을 헤아림)하는 일에 어찌 착한 것(善) 만을 일삼으랴, ‘선추’라고 하는 것은 흡족하지 못하다  라고 하자, 선추가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름(名)을 충(忠)이라 하고 자(字)를 서(恕)로 한 사람도 있고 이름을 서(恕)로 하고 자를 도(道)로 한 사람도 있다. 자를 서(恕)로 한 것은 차의 수레바퀴와 같이 앞 사람을 따르는 것이니 새의 날개와 같이 좌우를 엄호하는 뜻을 취한 것이요 자(字)를 도(道)로 한 것은 충서(忠恕)는 도와 가깝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를 충도(忠道)라고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실로 좋긴하다. 다만 내가 논어에서 받은 바로써 분별하면,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말 한마디로 가히 종신토록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는 ‘그것은 용서(恕)함이고, 자기가 하고저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 고 하였으니 이 말씀을 보더라도 다른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다.`……(중략)……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케 함이 다 추기하는 일이 아님이 없은 즉 집 위에 덧집을 얽듯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종신토록 종사하여 가히 행할만 하다는 뜻이면 될 것이니 그대의 자를 종신토록 옳케 행하라는 뜻으로 ‘가행(可行)’이라 하면 어떨까? 라고 하자, ‘좋다’ 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글의 내용은 선추(善推)라고 하는 조공(趙公)의 자를 가행(可行)으로 고치면 좋겠다는 자설(字說)의 글로, 곧 자를 들어 나게 지을 일도 아니지만 자기의 수양을 통하여 남에게 미칠 일이라, 먼저 자기의 선한 마음을 내 새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헌의 사상과 철학을 문학의 형태를 빌어 표현하였으니 먼저 자기완성을 꾀한 뒤에 남을 선한 곳으로 이끌려는 마음의 자세를 지니기에 항상 행할 것을(可行)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자기 자신이 항상 새기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헌이 남긴 글 중에 이안촌에 사는 곽이정(郭以禎) 곽이정(1619 ~1685) : 자는 위경(衛卿) 호는 양헌(讓軒)으로 성균관 사예(司藝)를 역임한 사오(沙塢) 곽용백(郭龍伯)의 아들로 홍 목재와 도의교하였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유일(遺逸)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 정4품)에 천거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가학(家學)을 펴면서 문장(文章)이 빛났으나 두문(杜門) 양지(養志)하니 세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불리었다.(『임천문집』)
이 거처하던 집의 당호(堂號)인「양헌(讓軒)」에 대한「양헌설(讓軒說)」이라는 글에서도 그의 선비로서의 심중을 알 수 있다.

 “양헌은 고 처사 곽(郭)공 이정(以禎)이 거처하던 집의 당호이다. 이안촌 마을 상류에 자라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를 사양연(辭讓淵)이라고 하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공이 일찍이 이곳에 이사와 살 계획이 있어서 먼저 외당(外堂)의 이름을 ‘양(讓)’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양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루는 공의 집을 찾아뵈었더니 나에게 집의 당호에 대한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하기에 사양하여 말하기를, ‘인의예지가 4덕(四德)이 되는데 양(讓)은 예(禮)에 치우쳐 인의지(仁義智)를 겸하여 관습하지 못하니 이는 4덕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하필이면 ‘讓’을 취하여 집(헌, 軒)의 편액을 삼았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지는 않네, 讓이 비록 사양한다는 한 가지의 덕이기는 하나 실로 4덕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것이네. 어질다고 하는 인(仁)에서도 사양하고 양보함이 없으면 이른바 측은한 마음은 문득 쇠잔해 식고 말 것이요, 의(義)로우면서도 이 讓이 없으면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하는 마음은 문득 메마를 것이며, 슬기로운 지(智)를 가지고도 이 양(讓)이 없으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是非)하는 마음이 꺾이고 말 것이네. ……(중략)…… 이로 미루어 말하면 양(讓)은 온갖 선(善)의 주인이 되거늘 어찌 하나의 덕(德)에 치우쳐 작은 덕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내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사양함은 그러하나 지금 공이 행하는 사양을 말 할진데, 어릴 때 배운 사양을 장년이 되어서도 사양치 않고 그대로 고집한 것입니다. 소년 시절에는 뛰어난 재주로 앞줄에 섰으면서도 커서 치루는 성시(省試)에 이르러서는 공의 친구들이 혹 끌어 들이려 하여도 공이 사양하고 그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아서 끝내 한가지 관직도 명 받지 못하였은 즉, 사양한 것으로 공 자신에게 보답되는 것이 없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아닐세, 만약 사양하지 않고 얻게 되었다면 그대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낸 것이 하늘의 뜬 구름에 지나지 않아서 비록 내가 헌에 거처하면서 혼자 그윽한 곳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네. 나는 차라리 사양하여 얻지 못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고 얻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부당하게 사양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자의 인(仁)을 지키는 것이 이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송구하게 생각하였다. 미쳐 이 양헌설(讓軒說)을 쓰기도 전에 공이 홀연히 세상을 사양하여 모습은 이미 아득하고 그의 곧은 정신 또한 없어졌지만 늘상 이 사양연(辭讓淵)을 지날 때마다 지난날의 이 일을 상상하여 존경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하여 두 선비 간에 차원 높은 철학적 상담을 주고 받았다.
  사양 정신을 주장하는 곽이정은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당하여 오랑캐 천지의 세상에서 벼슬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평생을 덕을 쌓는데 바친 선비이다. 한 마디로 사양하는 정신 하나로 스스로 숨어서 사는 것을 평생의 신조로 삼은 것이다.
  우헌이 곽이정의 사양하는 정신에 대하여,

 “옛 사람의 사양함은 그러하나 지금 공이 행하는 사양을 말 할진데, 어릴 때 배운 사양을 장년이 되어서도 사양치 않고 그대로 고집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의 고집스런 생각을 반문하였지만, 여기에는 우헌 자신의 생각도 은연중 내포하고 있었던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한다.
  더욱이 곽 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집 앞을 지날 때 다 그의 사양에 대한 정신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문장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우헌 채헌징의 평생은 중후하고 관대한 후덕장자(厚德長者)의 자질과 품성으로 일찍이 목재 홍여하의 사문(師門)에서 학문을 닦아 박학다식으로 훌륭한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향풍과 후진 양성에 기여한 당대 영남 우도에서 이름난 선비였다.
  벼슬살이에서도 약관의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 등 청환직(淸宦職)에서 임금을 바르게 보필하였고 진주목사 때는 촉석루를 중수하고 충신들을 배향한 묘우(廟宇)에 제향의례(祭享儀禮)를 정립하는 등 목민관으로서 선정(善政)을 한 상주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