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숭정처사 양헌(讓軒) 곽이정(郭以楨)의 사양정신

빛마당 2019. 4. 3. 21:30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숭정처사 양헌(讓軒) 곽이정(郭以楨)의 사양정신
      금 중 현

 

 곽이정[1619(광해 11) ~ 1685(숙종 11)]은 임란공신으로 일천 여 언(一千餘言)의 시페(時弊) 상소를 올려 선조 임금으로부터 의(義)로써 관작을 얻은 호재(浩齋) 곽수지(郭守智, 1555 ~ 1589)의 손자로 자는 위경(衛卿)이요, 호는 양헌(讓軒)이다. 그의 아버지 사오(沙塢) 곽용백(郭龍伯, 1588 ~ 1646)은 문과에 올라 고성현령,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으며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아 양대(兩代)가 문명(文名)을 얻어 3대(三代)로 이어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學問)을 닦아 김학수,「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한국사학) 박사학위논문, 2007:408(여헌문인록 참조). 
 수묵재(守黙齋) 박성민(朴成敏, 1603~1666)과 오봉(五峯) 채이항(蔡以恒, 1596~1666), 야옹(野翁) 이영갑(李英甲, 1622〜1676),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 무첨재(無添齋) 정도응(鄭道應, 1618∼1667),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 1648~1726) 등 당대에 현달한 현사들과 도의교(道義交)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한 이 후 벼슬에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일관하였다. 이 때의 심사(心思)를 일러,
 
湯水金城恃莫堅(탕수금성시막견)  성이 견고하다고 믿지 마라.
將軍相國任非賢(장군상국임비현)  현명하지 못한 장군과 관료를 등용함이라.
肆然秦帝今天下(사연진제금천하)  방자한 진시황 같은 천하에
蹈海那無倜儻連(도해나무척당연)  바다에 뛰어드는 魯仲連 노중련 : 중국 노나라의 충신이며 진시황의 정치에 반하여 바다에 빠져 죽음
과 같은 척당(倜儻) 척단 :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음.
이 없구나.

라고 하여 짓밟힌 나라의 한을 토하였다.
  정조 14년(1790, 경술)에는 함창향교 자리의 주맥(主脈)인 막구리산(莫求利山)에 은광(銀鑛)을 채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상소를 올릴 때는 소수(疏首)로 앞장섰다.
  상소문은 “청금 성묘주산채은소(請禁聖廟主山採銀疏)”라는 제목으로 그 대목 일부를 여기에 옮겨보면,

 “엎드려 아뢰옵건데 향당에는 향교가 있고 나라에는 태학(太學)이 있습니다. 신 등(臣等)은 함창향교에서 학문을 배우는 학도들로서 성스러운 학궁을 지키고저 합니다. --- 중략 --- 본 향교는 성현을 모신 조두지소(俎豆之所)일진데 지금 향교 뒤 주맥(主脈)에 은을 채광하기 위하여 수 십 개소의 산 허리에 구덩이를 파고 있습니다. --- 중략 --- 본 향교는 본현(本縣)의 서쪽 5리에 있고 본현의 진산(鎭山)인 재악산(宰嶽山)의 맥(脈)을 이어 온 자리로서『동국여지승람』에 재악산은 본현의 서쪽 13리에 웅거한다고 하였습니다. 본 향교는 재악산으로부터 저령(豬嶺, 돋마래미)으로 굽이쳐 다시 막구리산(莫求利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막구리산에 은광을 채굴하고 있으며 산세로 보아서 막구리산은 향교의 인후지지(咽喉之地)입니다.”

라고 하여, 은광 채굴사업을 적극 저지하는 뜻을 담았다.
  상소문은 소수(疏首)인 양헌공이 상경하여 복합(伏閤)상소 복합 : 나라에 중요한 일로 왕이 행차할 때 조신이나 유생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는 것
로 그 간절함을 전하였고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비답(批答)이 내려져 은광 채굴을 막게 되었으며 이 사실은 본 향교 명륜당(明倫堂) 기판(記板)에 수록되었다.
  왕에게 상소를 할 때 소수(疏首)의 책임은 막중하여 사안에 따라서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어렵고도 어려운 중책이다. 뿐만 아니라 대궐에 드나드는 모든 관원들의 질시(疾視)를 무릅쓰고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직접 상소하는 뜻을 전한다는 것은 여간한 의지가 아니고는 감히 행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옳은 일에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뜻을 이루고자 하는 양헌공의 의지와 기개(氣槪)를 엿 볼 수 있다.
  양헌공이 복합상소를 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여기에 옮겨본다.

伏閤感吟 二首(복합감음 2수)
山野微蹤覩漢宮(산야미종도한궁)  시골의 미미한 발길이 한양의 궁궐을 돌아보니,
於斯文物盛吾東(어사문물성오동)  문물이 우리의 동방에 번성하도다.
僊香靄靄宸楓襄(선향애애신풍양)  신선의 향기가 애애하여 궁궐을 돕고,
佳氣悤悤菀柳中(가기총총완유중)  아름다운 기운이 분주하게 완류의 가운데로다.
理燮陰陽賢輔策(이섭음양현보책)  음양의 이치로 어질게 돕는 계책이요,
師尊德性睿治隆(사존덕성예치융)  스승을 존경하는 덕성은 밝아 다스림이 융성하도다.
傍人休笑天閽叫(방인휴소천혼규)  옆 사람들은 궁궐문에서 부르짖음을 비웃지 마라.
紫極昭臨闕里通(자극소임궐리통)  궁궐에서 밝게 임하여 궐리와 통하도다.
風來殿閣自生凉(풍래전각자생량)  바람이 전각에 불어오니 서늘한 기운이 나고,
從此淸陰點四方(종차청음점사방)  이로 좇아 맑은 음덕으로 사방을 점검하고 살피도다.
出入天門今幾日(출입천문금기일)  궁궐문을 출입한 지 몇 날이 되었는가?
朝堂咸指嶺封章(조당함지영봉장)  조정에서 모두 영남의 상소하는 글장이라네.

  ‘양헌(讓軒)’이라 함은 사양하는 것을 처세의 근본으로 삼겠다는 공의 집 당호(堂號)로서 평생의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에 공과 도의교하였던 우헌(愚獻) 채헌징(蔡獻徵, 1648~1726)이 지은 「양헌기(讓軒記)」에 이르기를,

 “양헌은 고 처사(故處士) 곽공이 거처하던 집의 당호이다. 이안촌 마을 상류에 자라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는 사양연(辭讓淵)이라고 하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공이 일찍이 이곳에 이사와 살 계획이 있어서 먼저 외당(外堂)의 이름을 ‘양(讓)’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양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루는 공의 집을 방문하였드니 나에게 집의 당호에 대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사양을 하면서 말하기를,“인의예지(仁義禮智)가 4덕(四德)인데 이 중에 양은 예에 치우쳐 인의지(仁義智)를 겸하여 관습하지 못하니 이는 4덕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하필이면 양을 취하여 집의 편액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지가 않네. 양이 비록 사양한다는 한가지 덕이기는 하나 실로 4덕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것이네. 어질다고 하는 인(仁)에서도 사양하고 양보함이 없으면 이른바 측은한 마음은 문득 쇠잔해 식고 말 것이요, 의로우면서도 이 양이 없으면 불의(不義)를 부끄러워 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하는 마음은 문득 메마를 것이며, 슬기로운 지(智)를 가지고도 이 양이 없으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是非)하는 마음이 꺽이고 말 것이네. ---중략 --- 이로 미루어 말하면 양(讓)은 온갖 선(善)의 주인이 되거늘 어찌 하나의 덕(德)에 치우쳐 작은 덕이라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내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사양함은 그러하나 지금 공이 행하는 사양을 말 할진데, 어릴 때 배운 사양을 장년이 되어서도 사양치 않고 그대로 고집한 것입니다. 소년 시절에는 뛰어난 재주로 앞줄에 섰으면서도 커서 치루는 성시(省試)에 이르러서는 공의 친구들이 혹 끌어 들이려 하여도 공이 사양하고 그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아서 끝내 한가지 관직도 명 받지 못 하였은 즉, 사양한 것으로 공 자신에게 보답되는 것이 없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씀하기를 ‘아닐세, 만약 사양하지 않고 얻게 되었다면 그대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낸 것이 하늘의 뜬 구름에 지나지 않아서 비록 내가 헌에 거처하면서 혼자 그윽한 곳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네. 나는 차라리 사양하여 얻지 못하드라도 사양하지 않고 얻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부당하게 사양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자의 인(仁)을 지키는 것이 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송구하게 생각하였다. 미쳐 이 양헌설(讓軒說)을 쓰기도 전에 공이 홀연히 세상을 사양하여 모습은 이미 아득하고 그의 곧은 정신 또한 없어 졌지만 늘상 이 사양연(辭讓淵)을 지날 때마다 지난 날의 이 일을 상상하여 존경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하였다.
  두 선비 간에 주고 받은 이 장황한 글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양심(辭讓心)에 대한 비중이 어느 덕목보다도 중요하다는 높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양헌공의 사양하는 정신은 병자호란으로 국치(國恥)를 당하여 오랑캐 천지의 세상에서는 벼슬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평생을 덕을 쌓는 선비로 일관하였다.
  그렇지만 성현을 모시는 향교의 뒷산인 막구리산에 은광(銀鑛)으로 인하여 산이 훼손되는 불의(不義)에는 앞장서서 바로잡는 공의 일생은 의로움과 사양을 조화하는 덕(德)으로 살았던 사표(師表)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