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문과(文科) 회방(回榜)으로 정조(正祖)의 축하시를 받은 직신(直臣) 강항(姜杭)

빛마당 2019. 4. 4. 20:20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문과(文科) 회방(回榜)으로 정조(正祖)의 축하시를 받은

직신(直臣) 강항(姜杭)

                                                                               權 泰 乙
 
  시북(市北) 강항(姜杭·1702~1787)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선비의 도리를 다하여 의로(義路)에 섰던 직신(直臣)이요, 조선조 세 번째로 문과 회방(文科回榜·60돌)을 맞아 정조(正祖)로부터 축하시를 받은 영광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재, 문집을 구할 수 없어 그의 <행장(行狀)> 丁範祖, <行狀·知樞姜公杭行狀>, ≪海左集≫(권35)
을 중심으로 시북(市北)의 일생 행적을 소개하도록 한다.

<가계(家系)>
  시북 강항의 자는 이직(而直)이요 관향은 진주(晋州)다. 연산조에 절의를 세운 대사간 형(詗)은 8대조요, 고조는 찬(纘)이며 증조는 증 좌승지 홍윤(弘胤)이니 호는 야일(野逸)로 상주 봉대(鳳臺) 시거조(始居祖)며, 생부는 부호군 적(績)이다. 조는 증 호조참판 소리(素履) 균(均)이요, 아버지는 석우(碩遇)며 어머니는 예안이씨 이성일(李星逸)의 따님인데, 증 호조판서 석기(碩耆)의 계자(系子)가 되어 양모는 영천 최씨 최성(崔珹)의 따님이다. 시북(市北)의 배(配)는 풍양 조씨 조자경(趙自敬)의 따님과 후배(後配)는 상산 김씨 김상백(金相白)의 따님이다. 장남 필장(必章)은 좌은(坐隱) 세모(世暮)를 두었고 차남 세건(世謇)은 출계(出系)하였으며 삼남 과암(過菴) 세은(世誾)은 영남 3문장(嶺南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문장에 능한 아들 광사(曠士) 성흠(性欽)을 두어 시북(市北)의 학문과 사상은 전승되었다.

<수학(受學)>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민첩한 재능을 타고나, 8대조 대사간공 이래로 형성된 절의숭상(節義崇尙)의 가풍(家風)과 실천유학의 가학(家學)을 전수하였으며, 당대 명석(名碩)을 찾아 학문을 닦았다. 시북의 수학을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유학에 밝고 문장에 능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학만으로도 학문(學文)의 성취는 가능하였으리라 본다.

<벼슬길>
  <행장>에 의거하여 시북(市北)의 벼슬길을 요약하도록 한다.
  1726년(丙午·영조 2) 11월, 식년시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인으로 급제하여 이듬 해 승문원 부정자(종9품)로 벼슬길에 올랐다. 1734년 정자(정9품)에 오르고, 이듬 해 저작(정8품)·봉상시 직장(종7품), 1736년 성균관 전적(정6품)에 올랐다. 1737년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정6품)이 되고, 1743년 예조좌랑·평안도 도사(종5품)가 되었다. 1754년 영희전(永禧殿) 영(令·종5품)이 되고 1755년 형조정랑(정5품)에 올라 불의 부정에 맞서다가 끝내 관서의 좌막(佐幕)으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자연과 벗하여 스스로 즐기었다.
  1771년(70세·영조 47) 첨지중추부사(정3품)에 승진되고 1781년(80세·정조 5) 동지중추부사(정3품)에 승진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지 60돌이 되는 1786년(丙午·정조 10)에 문과회방(文科回榜)을 맞아 왕이 기이하게 여겨 특명으로 가의(嘉儀)·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가자(加資)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정2품)를 제수하였다. 사은숙배하는 자리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를 제수하고 기로사(耆老社)에 들게 하였다. 곧 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정2품)에 승계되었으며, 1787년 12월 12일, 86세로 별세하였다.
  시북(市北)의 벼슬길은 5품에서 좌절되었다가, 70세 이후 정2품에 오르는 행운을 맞았다고 하겠다.

<행적>
  ○ 고향인에게 베푼 인애(仁愛)
  벼슬로 서울에 있을 때, 천연두에 걸린 고향 사람이 있었다. 급성 전염병이라 남은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데도 약물과 음식을 대고 친히 보호하였으며, 그가 죽자 친히 염습하여 관에 넣고 운구를 도와 귀향하였다.(행장)
  지금은 종두로 완전 해방되었지만 시북(市北)이 살던 시기의 천연두는, 가장 두려운 역질로 인척도 접촉을 꺼리던 역질이었다. 시북의 인애는 길이 미담으로 남았다.

  ○ 시북(市北)의 종기 고름을 빨아준 벗
  시북이 일찍이 심한 종기를 앓자 벗이 눈물을 흘리며,“이 사람이 죽으면 우리들이 누구를 의지하랴.”하고,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었다 한다.(행장) 이로써도 시북의 인해하는 마음과 의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기개가 남을 감화시킴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 초지일관(初志一貫)한 선비의 지조
   ∙ 제1화, 공사(公私)에 한결같은 지조
  시북(市北)이 지조를 지킴이 심히 확고하여 털끝만큼도 권세나 이익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김상성(金尙星·1703~1755) 金尙星의 호는 陶溪다. 문과급제로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경상도관찰사(재임 1742~1744)를 역임하였다.
이 시북의 병환 소식을 듣고 약물을 보내었는데, 뒤에 부탁할 일이 있어 시북을 만나자 공이 사절하여,“진실로 공의 후의를 입은 은혜가 있으나, 재상으로서 불가능한 일을 시키렵니까?”하고, 청을 완곡히 거절하였다.(행장)
  공사(公私)에 의리를 지키려는 시북의 한결같은 지조를 볼 수 있다.

   ∙ 제2화, 형세(形勢)를 따르지 않은 선비의 지조
  관서의 막료(1742·평안도 도사)로 있을 때 김약로(金若魯·
1694~1742) 金若魯는 호가 晩休堂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에 이르렀고 평안도관찰사(1742)를 역임하였다.
가 도백(道伯·관찰사)이었는데 시북의 훌륭한 태도 풍채, 언론의 뛰어남을 보고 아끼어 조용히 당시의 형세로써 풍유(諷喩)함에 시북이 웃으며,
 “선비가 스스로 지킴이 있나니, 이른바 시기와 세력을 알 일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행장) 당대 극성했던 노소론(老少論)의 형세를 보거나 정계의 동향을 살펴 적당히 대처함이 출세에 도움이 되리라 넌지시 깨우쳐 주려 한 호의나, 형세를 따르지 않은 시북의 처세관이 확고함을 알 수 있는 일화다.

   ∙ 제3화는, 견리사의(見利思義)한 선비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의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보라(見利思義)는 말이 있다. 김상철(金尙喆·1712~1791) 金尙喆의 호는 華西다. 문과급제로 영의정에 이르렀고 경상도관찰사(재임 1762~1764)를 역임하였다.
이 영남 도백이 되어 은퇴한 시북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고 위문하였는데, 이조판서로 부름을 받고 부임할 때 편지를 시북에게 보내어 만나자고 하였다. 시북이, 문관(文官)을 전형하는 전관(銓官·이조판서)을 사사로이 만남은 선비의 체모에 어긋나 꺼리는 일이 된다 하고 만나지 않았다.(행장) 실로, 견리사의(見利思義)한 선비였다 하겠다.
  또 한 경우의 일화가 있다. 시북(市北)이 살던 당시는 임기응변으로 맞서기도 하고 의지하여 붙좇기도 하는 무리가 많았는데, 때를 타서 의기양양한 무리들이 시북을 유인하고자 하니 시북이 정색을 하여 말하기를,
 “사대부가 곧 굶어 죽을지언정 어찌 무덤 사이를 오가며 남은 젯밥이나 빌어먹는 자를 본뜰 수 있으랴!” ≪嶺南人物考≫.“士大夫卽餓死耳 豈可效墦間步耶”

하고, 끝내 저들 무리와 더불어 교제하지 않았다. 위의 말은 ≪맹자(孟子)≫의 말로,“마침내 동쪽 성곽(북망산이 있는) 무덤 사이의 제사하는 자에게 가서 남은 음식을 빌어먹다” ≪孟子·離婁下≫.“卒之東郭墦之祭者 乞其餘”
라는 말이 있다. 제(齊)나라 어떤 이가 처첩을 거느리고, 무덤 사이를 오가며 젯밥과 고기·술을 얻어먹고 집에 와서는 부귀한 자와 어울렸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끝내는 처첩이 알고 통곡하였는데도 저만 모르고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 하였다는 고사에서 생긴 말이다. 저에게 아무런 실(實)이 없는 위인이 권세에 빌붙어 흡사 자신이 세력가인 양 거들먹거리는 위인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을 시북(市北)은 ‘번간보(墦間步)’란 말로 요약한 것이었다.
  위의 두 일화는,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밤중에 애걸하여 그것을 얻고서는 백일하의 남 앞에서는 교만을 부리는 폐습이 정계에 만연하였을 때, 시북은 ‘이 끝을 보고 그것이 도의에 합당한가를 생각하라(見利思義)’한 성인의 훈계를 그대로 지키었다 하겠다. 한 마디로, 시북(市北)은 의로(義路)를 밟는 군자유(君子儒)에로의 삶에 충실하려 한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 제4화, 무신란(1728)에 창의
  정희량 등이 무신란을 일으킴에 승문원 부정자로 두셋 동지와 창의하여 적을 성토하고 사로잡을 만반의 대책을 세워 시행 도중, 역적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행장)

   ∙ 제5화, 권세에 굴복치 않은 의기(義氣)
  1734년 승문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는데, 관리 선발에 기초가 되는 권선록(圈選錄)을 마련함에 당하여 세도가인 김한철(金漢喆)이 자기 장인을 위하여 승문원의 선발에 들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시북은, 공의(公議)에 의거하여 성균관에 분속시키었다.(행장)
  1737년, 호조좌랑이 되어서는 명을 받들고 호남의 염세(鹽稅)와 세입(稅入)을 감독하게 되었다. 도백과 수령으로 부정에 물든 자가 많아서 장부를 살펴 일일이 징수 독촉하였다. 도백(道伯) 윤득화(尹得和)가 우려하여 시북과 친한 이를 골라 누차 후리(厚利)로써 꾀며 일을 그치도록 요구하였다. 끝내 시북이 듣지 않자, 윤(尹)이 당시의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시북을 흉악한 백액호(白額虎)로 몰아 파면시키었다.(행장)
  1755년 형조좌랑이었을 때는,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의 종이 권세를 믿고 불법을 자행하여 체포해 치죄하려 하니 종이 주인의 집으로 숨는 일이 생겼다. 시북이 홍에게 완곡한 말로 풍유(諷諭)하기를,“집안의 종이 횡포하여도 금하지 않고 게다가 그를 숨김이 어찌 재상 사체(事體)리오.”하였다. 끝내 정탐하여 체포해 치죄하였다.(행장) 이 무렵,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역적에 관련된 옥사에 걸려서도 도리어 영의정 이종성(李宗城·1692~1759)을 상소로 모함하고자 하여 시북에게 와서 의향을 엿보거늘 엄히 배척하여,“정실(情實)을 살피지도 않고 남을 모함하여 이익을 구함은 사대부가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꾸짖었다. 그 사람이 몹시 노하여 당시 요로(要路)에 격한 어조로 비방하기를,“모(某)가 언간(言諫)의 지위에 들면 반드시 화(禍)를 부를 사람이다.”라고 하여, 얼마 아니되어 또 관서의 좌막으로 좌천되었다. 드디어, 시북(市北)이 벼슬길에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산수와 벗하여 여생을 마치러 하였다.(행장)
  위의 몇 사례로서도 의로(義路)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시북(市北)의 기개를 엿볼 수 있거니와 부정 부패의 사욕에 수치심도 느낄 줄 모르던 무리들이 도리어 정도(正道)에 선 시북으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맹수 백액호(白額虎)로 취급하여 사사건건 그 손발을 묶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 벼슬길에서 막힘이 많았으나, 절의가(節義家)의 후예답게 자신을 지키고 가문의 자손심을 지킨 선비로 그 방명(芳名)은 오래 남았다.

  ○ 사도세자를 옹호할 한 사람의 신하조차 없었더냐고, 극간(極諫)을 서슴지 않은 시북(市北)의 의분(義憤)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이 되어 변(1762.5.13 뒤주에 갇힘)을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 분개하여 이르기를, “나의 업(業)이 이미 나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으니, 비록 초야에 있은들 나라에 변고가 생겼는데 감히 죽기로 한 일을 잊으랴!” <행장>.“吾業已許身 雖在野 國家有變 敢忘死耶”
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문을 초하였다. 의분을 참지 못하여 큰 소리로 극간을 서슴지 않았는데, “전하의 조정에는 한 사람의 전천추(田千秋) 田千秋는, 한나라 무제 때의 명신. 무제의 태자(據)가 강충(江充)의 무고를 입어 무고옥사(巫蠱獄事)에 원통하게 자결하였다. 뒤에 전천추가 태자의 억울한 누명을 소송으로 설원하였다. 무제도 전천추의 사람됨을 알고 그에게 하루에 아홉 번의 벼슬을 옮겨주어 10일만에 정승으로 삼고 후(候)를 봉하였다.
도 없었습니까!”라고 하였다. 한 번 죽을 결심으로 상소길에 올랐다가 함창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죽은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평상시에도 이 때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만년에 시북이 실명한 것도 사람들은 다 이 일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嶺南人物考≫ 소재.

  8대조 대사간(詗)공은 의리를 지켜 연산군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한 절의의 기상을 8대손 시북(市北)의 상소문에서도 볼 수 있다 하겠다. 명가(名家)란 예사로 붙일 수 있는 찬사가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 정조(正祖)가 하사한 회방 축시(回榜祝詩)
  시북(市北)이 85세가 되던 1786년(丙午·정조 10)은, 그가 1726년(丙午·영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한 지 60돌이 되는 회방세(回榜歲)였다. 대신이 시북의 회방을 아뢰었는데, 문과 회방은 국조에 오직 찬성 송순(宋純)과 판서 이광적(李光迪) 및 시북(市北)뿐이어서 왕이 기이하게 여겨 특명으로 가의대부(종2품)와 자헌대부(정2품)에 가자하고 지의금부 도사(정2품)를 제수하였다. 수레를 타고 와 사은(謝恩)토록 명하고, 예궐하자 내시에게 명하여 부액하여 대전에 오르게 하였다. 침식이며 기거의 상황을 물음에 왕의 뜻에 맞게 아뢰니 다시 지중추부사(정2품)를 제수하고 명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게 하였다.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선부(選部)에 영을 내려 벼슬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 실직(實職)에 의망(擬望)토록 하고 쌀과 비단, 땔감과 숯을 하사하였다.
  이 때가 마침 신년문과 합격자 명단 발표인 창방(唱榜)때라, 어사화(御賜花)·사모(紗帽)·도포(道袍)·띠(帶)를 하사하고 명하여, 새로 급제한 신은(新恩)의 예로 사은하게 하였다. 또, 헌거(軒車)·구마(厩馬)·어개(御盖)·법악(法樂)을 하사하고 숙종이 이광적에게 시를 하사한 선례에 따라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총애하였다. 귀향함에 미쳐서는 도신(道臣)에게 회방연(回榜宴)의 비용을 대도록 명령을 내렸으니, 일찍이 국조에 없었던 특별한 예우였으며 오래지 않아 정헌대부(정2품)에 승자(陞資)시키었다.(행장)
  이 때의 경사스러움을, 시북의 학덕을 잘 알던 향리의 후배 강재(剛齋) 이승연(李承延)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공의 모습은 맑고 밝으며 단정하고 정중하며, 사람됨은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는 정의심이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며 민첩하고 용감하여 응당 사헌부나 사간원같은 대각(臺閣)에 배치하여 퇴패한 풍속을 억누름이 합당한데도 끝내 공으로 하여금 초야의 진토 중에서 말라죽게 한 것은 누가 그리 한 것이리오. 오늘의 어진 신하가 명군(明君)을 만나 서로 뜻이 맞았음은 어찌 하늘이 그리한 것이 아니랴!” ≪鹽州世稿·剛齋遺稿≫(권4). <詩·謹次御製韻呈姜知 事台丈回榜宴席二首>.“公姿狀淸明瑞重 爲人慷慨精悍 合置臺閣 彈壓頺俗 而卒使乾沒於巖砑塵土者 孰之然哉 今之遣逢 豈非天哉”


라고 하였다. 정의로운 법을 시행할 대각(臺閣)에 중용하였더라면 퇴패한 풍속을 진정시킬 재능을 지닌 인재를 당쟁의 희생물로 삼았던 자가 누구냐고 힐문하였다. 당대 권력을 잡은 자들을 나무람이 엄하다. 그러면서도, 끝내는 어진 신하가 명군을 만나 오늘의 크나큰 은혜를 입게 되었음을 천우신조한 일이라 축하하였다. 이 모든 영광은 임금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80의 대질(大耋)에 이르도록 오로지 선비도(道)를 지켜 어떤 환경에서나 낙천지명(樂天知命)하여 장수를 누림으로써 선비로서 누릴 수 있는 지극한 영과의 주인공이 된 찬사는 언외(言外)에다 펼쳐 놓았다.
  먼저, 시북(市北)의 회방(回榜)을 시로써 축하한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보면,

齒德巍然世所希(치덕외연세소희)  나이와 덕이 높기를 세인이 다 바라는 반데
二尊今日摠卿歸(이존금일총경귀)  이 두 높은 것이 오늘 모두 경에게 돌아갔도다.
白首簪花存盛事(백수잠화존성사)  백수(白首)에 잠화(簪花)도 성사이거늘
重回龍榜古來稀(중회용방고래희)  용방(龍榜)이 거듭 돌아온 일을 옛부터 드물었네.

라고 하였다. 과거 급제(龍榜)의 영광을 한 번 맞기도 어려운데 60년만에 다시 맞게 됨(回榜)은 고금에 드문 일이라 축하하였다. 실로 시북(市北)의 영광은 시북 개인의 영광일 뿐만이 아니라 한 고을의 영광이기도 하여, 회방연(回榜宴)이 상산의 잔치이기도 하였음을 강재도 차운시를 바치며, 이같은 희귀한 일들을 우리 향토의 장고(掌古·典故)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강재의 시(둘째수)는,

崇班八座固難希(숭반팔좌고난희)  높은 반열의 팔좌(八座) 八座는, 여덟 종류의 고급 관원.
는 실로 바라기 어려운데
何況新榮舊甲歸(하황신영구갑귀)  하물며 신은(新恩) 新恩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이름.
의 영광 옛 갑자(甲子) 돌아옴에랴.
晝錦華筵人簇簇(주금화연인족족)  주금당(晝錦堂) 晝錦堂은, 송나라 명신 韓琦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고향인 하남성 安陽에 세운 정자. 여기서는 시북의 집을 미화함임.
 빛나는 자리 빽빽한 하객들
爭言盛事古今稀(쟁언성사고금희)  다투어 이같이 성대한 일은 고금에 드물다네.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상주의 많은 선비들은 어제시에 차운하여 축하하였는데 일일이 다 소개하지 못한다.

  ○ 시북(市北)이 남긴 작품
  앞의 어제시에 차운시나 감회를 읊은 시가 있었을 것이나 현재 발견되지 않고, 김천 직지사(直指寺)에 남긴 추담대사비명 李智冠, ≪韓國高僧碑叢集≫(조선조~근현대), 가야산문고, 1994.
   <有明朝鮮國禪敎兩宗秋潭堂大師碑銘幷序>
 한 편이 있어 이에 소개한다.

 “영남의 금릉(현 김천) 땅 명적암(明寂菴)에 영각(影閣)이 있으니, 부휴(浮休) 浮休는, 조선의 승려로 善修(1543~1615)의 法號임.
의 적전제자 추담대선사(秋潭大禪師) 법휘(法諱) 관징(琯澄)의 계단(戒壇)이다. 대사의 속성은 백씨(白氏)요 수원으로 임오년(1702·숙종 28) 10월 24일 금릉 위동리(衛洞里)에서 탄생하였다. 모친의 꿈에 달이 품으로 드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그 태어날 때도 또한 꿈에 달을 보았다. 나이 열 셋에 뇌원(雷遠)에게 출가하여 원공(圓空)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열 다섯에 사방이 대종사문(大宗師門)으로 일컫는 회암(晦庵)·낙암(洛岩)·환성(喚醒)·쌍운(雙運)·대적(大寂)의 문하에 유학하였고, 끝내는 운암(雲岩)의 사(嗣)가 되었다. 여러 법조(法祖)가 다 찬탄하여 상승(上乘·大乘)을 기대하였다. 계축년(1733·영조 9)에 학문이 대성하여 드디어 진세를 장악해 등단하여 명성이 크게 떨치니 사방 팔방의 중생이 방문하는 익자(益者)들이 날로 수 백이었으나 가르쳐 이끎이 진진(넘칠 정도로 가득참)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고, 칼로 해부하고 실가닥을 나누듯 통연(환하여)하여 마치 어두운 길에 촛불을 밝힌 것 같았다. 이런 까닭에 그 문하에 묘오자(竗悟者)가 많았다.
  대사의 의용은 살갗이 희고 깨끗했으며 키는 8척이고 허리는 수 아름이었다. 성품이 젊어서부터 엄중하였고 노경에 도통하여 물(物)과 더불어 구유(呴濡·가움에 고기가 거품을 내어 다른 고기의 비늘을 적셔주듯 남의 어려움을 도움)하여 혼연일체로 자비(慈悲)·대덕(大德)을 이루었다. 남는 일로 시문(詩文) 역시 전아하여 지팡이가 한 번 산을 나서면 사방에서 호응하여 가르쳐 이끎이 깊고 넓어 원근에 미치어 당시의 여러 명석(名碩)인들 혹이라도 앞서는 이가 없었다. 세상의 표충(表忠)·장석(長席)에서 반드시 택함에 극망(極望·시력이 미치는 데까지 멀리 바라봄)하여 대사가 여러 번 거(居)하였다. 운수(雲水)와 명적(明寂) 두 암자에 다 진영이 있으니 아, 성대하도다.
  지금의 임금 무술년(1778·정조 2) 5월 6일에 명적암에서 돌아가니 7일에 초서골(超瑞骨)하고 그 제자 광민(廣敏) 등이 부도를 세워서 갈무렸다. 10년 뒤 정미년(1787)에 문도 총화(摠華)가 장차 영각(影閣) 앞에 비석을 세우려 하여 내게 비문을 의뢰해 왔다. 아, 대사는 무량(無量)의 몸으로 삼법계(三法界)를 역(歷)하였으니 상현(常現)이 불상현(不常見)인 즉 또  뭣 때문에 부도를 만들며, 또 어찌 돌에 글을 새길 것인가. 그러나, 총화(摠華)의 정성을 중위(重違)하여 끝내 명(銘)을 지었으니 명(銘)에 말하였다. 공(空)이라 하면 공(空) 아니라 감정에 적응함이 마치 울림같았네. 명명한 가운데 묘계(竗契·신묘하게 서로 맞음)를 구하여 호랑이가 엎드리고 용이 숨었네. 도솔천을 촛불로 밝힌 자가 대사 진상(眞像)이던가.”

  이 비문은 시북(市北)의 나이 86세 때로 돌아가시던 해에 썼다. 김천 직지사가 배출한 고승의 비문을 상주의 선비가 닦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북(市北)의 당시 문명(文名)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문(碑文)과 전자(篆字)는 호린(皓隣) 강세백(姜世白)이 썼다.


<맺는 말>
  시북(市北) 강항(姜杭·1702~1787)은 조선조 세 번째로 문과 회방(文科回榜·60돌)의 희귀한 주인공이 되어 정조(正祖)로부터 지극한 은전(恩典)을 입고 어제 축시(御製祝詩)까지 받은 행운아로 널리 알려져 왔다. 워낙 희귀한 영광 뒤에 시북(市北)의 선비다운 참 모습은 도리어 묻혀 온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시북(市北)과 동 시대에 살아 그의 일생을 몸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해좌(海佐) 정범조(丁範祖) 찬의 <행장>을 살핌으로써 시북이 대각(臺閣 ; 사헌부·사간원 등)에 합당한 동량재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군자유(君子儒)의 삶을 지향하여 의로(義路)에 서서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다가 도리어 당대 세도가의 눈 밖에 나서 벼슬은 종5품의 하관에 그치었고 50대 초반에 벼슬을 버려야 하는 불운을 겪어야만 하였다. 시북(市北)은 초야에 묻혔으나 절의가(節義家)의 가풍(家風)을 이은 명가(名家)의 후예답게 국난(國難)에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할 각오로 선비정신을 발양하여 실천유자(實踐儒者)의 전형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낙천지명(樂天知命)하여 장수를 누림으로써 문과 회방(文科回榜)을 맞았고, 귀한 것을 귀히 여기는 현군(正祖)을 만나 벼슬은 정2품 고관에 오르고 ‘장수·덕행(齒德)’을 겸전한 사람으로 왕의 찬사를 받은 문신(文臣)이 되었다. 더구나, 한 편에 불과하지만 시북이 남긴 비문(碑文)을 통하여서도 그의 박학과 문장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직신(直臣)으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박학·문장으로서 선비의 도리를 다한 덕행 군자(德行君子)였기에 문과 회방(文科回榜)에 정조(正祖)가 시북(市北)에게 베푼 은혜가 큰 만큼 더욱 값진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