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경(敬)과 덕(德)으로 일관한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빛마당 2019. 4.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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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敬)과 덕(德)으로 일관한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김 정 찬

 

  공(公)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자는 회가(晦可)이고 호는 역천(櫟泉)으로, 1705(숙종 31)∼1768(영조 44)년까지를 일기로 하신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아버지는 요좌(堯佐)이고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 이재(李縡, 1680∼1746)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도승지·대제학·공조판서에 올랐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도암집(陶菴集)』·『도암과시(陶菴科詩)』·『사례편람(四禮便覽)』·『어류초절(語類抄節)』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의 문인이다.
  사화(士禍)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이사 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 받았고 별유(別諭)까지 받았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 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공(公)은 얼굴이 넓고 키가 컸으며 넓은 이마에 눈이 빛나며 용모와 풍채는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문정공(文正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성품은 장중하고 과묵하며 평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며 온화하고 깨끗하였다. 사람과 접할 때는 모두 온화하게 하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단호하게 의리로 하니 엄격하고 반듯하여 침범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학문은 주자(朱子)의 법도를 따라서 지행(知行)을 겸비하고 동정(動靜)을 서로 도와 오직 경(敬)에 힘을 쏟았다. 독서는 순서를 밟고 정밀함을 이루어 마음에 두어 체험하는 것을 요지로 삼았다. 행동을 절제할 때는 효우충신(孝友忠信)으로 하고 온후하고 솔직한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일 없이 있을 때는 조용하게 앉아서 마음을 맑게 하며 큰 근본을 체득하였다. 근세에 심성(心性)을 놓고 하는 논쟁은 호중(湖中)의 여러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성인과 일반인의 마음이 같지 않다고 하는 설명은 최고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공은 고매한 성품에 노력까지 곁들여 적은 노력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고 어렵지 않게 얻었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는 덕으로 이루고 단정하고 강직하며 얼굴색은 편안하고 정신은 곧으며 기운은 온화하고 말씀은 맑으며 아무리 급한 일에도 온당하였고 자연스러움 속에 법도가 있었다.

  공(公)은 지극한 효로 부모를 섬겼는데 어머님이 만년에 아플 때는 곁에서 간호하고 약을 올리면서 애띤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치 어린애와 같이 하였다. 음식과 의약은 정성을 다해 올렸으며 조금도 소홀하거나 누락되지 않게 하였다. 동생 한정당(閒靜堂) 송문흠(宋文欽, 1710∼1752)과 함께 아주 우애있게 지냈는데 만년에는 함께 살며 마주 앉아 강론하고 설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동생이 익찬(翊贊)의 벼슬을 받아 서울에 근무할 때 공이 하루는 갑자기 슬픔이 몰려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보(杜甫)의 동곡가(同谷歌)에 부응하는 내용을 지어 보내자, 동생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동생 부부가 모두 죽었을 때 너무 슬피 울어서 마치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는 집의 형편을 묻지 않았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면 옷을 벗어서 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도 같았다. 실수하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가르치고 고쳐지게 되면 진심으로 기뻐하였고 지나간 것은 따지지 않자 마을에서는 공경하게 되었고 사나운 사람들도 자연스레 교화가 되었다.

  일찍이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와 함께 병천에서 책을 읽을 때, 병이 생기자 공이 지극하게 간호하였는데 민우수가 돌아가면서,

 “성인군자라도 이와 같을 수는 없다.”

라 하였다.
  정성으로 선조를 모셨는데 가례(家禮)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사당에 절을 올렸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풍요롭고 깨끗하게 하며 목욕재계하고 반드시 예법에 맞게 하였다. 우리나라 풍속은 묘모(廟墓)의 경중을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였는데 절기마다 가묘에는 제사를 지내고 묘에서는 봄, 가을에만 제사를 올렸다. 설날과 단오는 다만 술과 과일로 묘를 돌보는 것으로 하였다.

  공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문집 약간의 분량은 집안에 있다. 부인은 청풍 김씨(淸風金氏)인데 군자감정을 지낸 김도흡(金道洽)의 따님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동생의 둘째 아들인 송시연(宋時淵)을 양자로 삼았는데 이 분이 나중에 신령현감이 되었다. 측실에는 3남 2녀가 있다. 아들은 희연(希淵),탁연(躍淵),이연(履淵)인데 모두 일찍 죽었다. 사위는 조성규(趙成逵),김희주(金希柱)이다. 송시연은 아들 2명을 두었다. 첫째는 계간(啓幹)이고,둘째는 계백(啓栢)이다. 사위는 홍면섭(洪冕爕), 김재준(金在璿),조만영(趙萬永)이다. 희연(希淵)과 이연(履淵)은 각각 1남 1녀가 있다.

  공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李縡)·민우수(閔遇洙)·송사능(宋士能)·김양행(金亮行)·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역천집(櫟泉集)』이 있다.

  연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왕력

서기

간지

연령

기사

숙종

31

1705

을유

1

1021, 漢城 濟生洞에서 태어나다.

숙종

44

1718

무술

14

生祖父牧使公 宋炳翼을 당하여 懷德宋村으로 돌아오다.

숙종

46

1720

경자

16

金道洽의 딸 淸風金氏와 혼인하다.

경종

2

1722

임인

18

1, 부친이 해직되어 沃川 同安里로 돌아가다. 4, 塗谷(龍湖)으로 거처를 옮기다. 이후 擧業을 폐하고 性理學에 전념하다.

경종

3

1723

계묘

19

10, 부친상을 당하다. 12, 부친을 塗谷에 장사 지내다.閨鑑을 편찬하다.

영조

1

1725

을사

21

4, 祖母 李夫人의 상을 당하여 長孫으로 承重하다. 7, 懷德 宋村으로 거처를 옮기다.

영조

3

1727

정미

23

3,自警語를 쓰다. 8, 金聖采와 함께 關西를 유람하다. 花田에 가서 陶菴 李縡를 뵙고, 이후 계속 왕래하며 질의하다.

영조

4

1728

무신

24

9, 부친이 독서하던 장소인 聞慶瓶泉으로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동생 宋文欽佳山寺에서 독서하다.

영조

5

1729

기유

25

부친의 家狀을 찬하고, 陶菴 李縡에게 墓誌를 청하다. 겨울,煌煌集을 편찬하다.

영조

7

1731

신해

27

제생들과 講會를 행하다.

영조

8

1732

임자

28

10, 淸州에서 閔鎭遠을 만나다.

영조

9

1733

계축

29

瓶泉亭舍를 중수하다.

영조

10

1734

갑인

30

2, 坡州를 유람하다. 紫雲書院, 花石亭, 來蘇亭을 돌아보다. 3, 陶菴 李縡가 내방하다. 4, 豆溪陶菴을 찾아 뵙고玄繩錄을 질의하다. 5, 飛來庵 玉溜閣에서 宋能相과 함께 독서하다.

영조

11

1735

을묘

31

1, 自警箴을 짓다.

영조

12

1736

병진

32

1, 豆溪로 가서 陶菴을 찾아 뵙고 같이 鳳林洞을 유람하다. 2, 尙州 興巖으로 가서 洛東江舟遊하다.

영조

14

1738

무오

34

3, 동생 宋文欽과 함께 華陽洞을 유람하다. 11, 光州 無等山을 유람하다.

영조

15

1739

기미

35

2, 黃山을 유람하다. 6, 恭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12, 閔遇洙와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고 太極圖說을 강론하다.

영조

16

1740

경신

36

道峯書院을 찾아가다. 金元行을 방문하다.

영조

17

1741

신유

37

1,同春先生年譜를 중간하다. 3, 申韶함께 太極圖說을 강하다.

영조

21

1745

을축

41

11, 寒泉에 가서 陶菴을 뵙고 栗谷全集稟目을 적어 올리다.

영조

22

1746

병인

42

10, 金聖梓俗離山을 유람하다. 陶菴 李縡를 곡하다. 侍講院 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영조

23

1747

정묘

43

4, 寒泉에 가서 陶菴靈筵에 곡하다. 東宮賜扇賜曆을 받다.

영조

24

1748

무진

44

, 楸谷正寢을 짓고 櫟泉이라 개명하다. 大報壇毅宗皇帝追享할 것을 건의하다.

영조

26

1750

경오

46

5, 衛率에 제수되다. 7,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다. 9, 상이 온천으로 행행하며 召命하자 상소하여 사직하다. 10, 忠淸 都事에 제수되다. 12, 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27

1751

신미

47

聖廟位號釐正하기를 건의하다.

영조

28

1752

임신

48

2, 掌令에 제수되었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10, 宋文欽의 둘째 아들 宋時淵을 후사로 삼다. 12, 동생 閒靜堂 宋文欽을 곡하다.

영조

29

1753

계유

49

1, 軍資監 正에 제수되다.

영조

30

1754

갑술

50

2, 특별히 書筵官에 제수되고 別諭가 내렸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영조

31

1755

을해

51

2, 申韶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7, 玉果 縣監에 제수되다. 8, 왕세자의 소견에 응하여 大學을 강하고 勉戒를 올리다.

영조

32

1756

병자

52

, 진휼을 행하다. 2, 小朝下諭하자 上書하여 饑民救濟策을 아뢰고, 金麟厚柳彭老 등의 賜額을 청하다. 鄕校를 옮겨 세우고 尤庵, 同春追享하다. 詠歸書院祭儀를 개정하다. 9, 모친상을 당하다. 11, 櫟泉으로 돌아오다.

영조

35

1759

기묘

55

2, 世孫講書院 右勸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4, 華陽洞을 거쳐 瓶泉으로 돌아가다. 10, 執義에 제수되고 勸讀을 겸하였으나 사직하다.

영조

36

1760

경진

56

2, 方山書堂에서 강학하다. 通政大夫로 자급이 오르고 禮曹 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37

1761

신사

57

3, 동부승지,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8, 講書院 諭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

38

1762

임오

58

2, 沁都姑母를 찾아 뵙고 花石亭에 오르다. 崇賢書院의 유생이 山長이 되기를 청하다. 4, 再從姪 宋志淵華陽洞에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8, 世孫 贊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12, 사관을 통해 잇달아 別諭가 내렸으나 啓辭를 올려 사양하다.

영조

39

1763

계미

59

2, 景賢堂에 입시하여中庸을 강하다. 경연중 金時粲, 尹蓍東 등을 구원하여 엄한 하교를 받다. 상소 내용 중 赤芾의 비유가 외척과 근신의 중용과 탕평책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엄한 하교를 받고 田里로 방축되다.

영조

40

1764

갑신

60

9, 金元行과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10, 伽倻山을 유람하다. 12, 지난번 상소로 인해 당론을 했다는 이유로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다.

영조

43

1767

정해

63

崇賢書院에서 講會하다.

영조

44

1768

무자

64

竹林書院의 유생이 山長으로 청했으나 사양하다. 4, 瓶泉에서同春先生文集을 수정하고, 興巖으로 가서同春先生文集刊役을 지휘하다. 5, 同春舊堂에서 여러 아우, 조카들과 講學하다. 713, 塗谷에서 졸하다. 8, 復官의 명이 내리다. 9, 錦山 川內里에 장사 지내다.

영조

48

1772

임진

-

官爵追奪하고 아들 宋時淵은 제주로 원찬되다.

영조

50

1774

갑오

-

復官되다.

정조

16

1792

임자

-

燕岐 葛山으로 이장하다.

순조

5

1805

을축

-

1, ‘文元으로 시호를 내리다. 文集이 간행되다.(宋時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