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시험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빛마당 2008. 1. 28. 13:35

171. 시험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기도 하지만 일선 학교에서는 시험의 계절입니다. 고등학생들이 건너야 할 가장 끔직한 수능이 막 끝나고 기말고사가 시작됩니다. 이때가 되면 학생들의 가슴은 천근만근 무거워 집니다. 시험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이 이들의 심정이니까요.

한글로 ‘시험’이라 쓰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사물의 성질이나 기능을 실지로 증험(證驗)하여 보는 일.’,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또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글자 그대로 시험(試驗)과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끌다.’는 유혹(誘惑)입니다. 우리 삶은 크고 작은 경쟁의 연속입니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요구하고 이 차이를 가리기 위해 시험이 등장합니다. 이미 창세기부터 경쟁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祭祀 드리는 방법과 정성의 차이로 인류 첫 경쟁은 살인으로 끝나는 불행을 겪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시험은 이래저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꼭 고통만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마친 후 찾아오는 성취감은 또 다른 기쁨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삶의 여정에 끝없이 경험하는 시험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 드리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이/O.M.R 카드 위에 선다/시작-/한 학기의 결실을 찾아가는/미로 찾기/ 알 수 없는 번호와/ 비좁은 칸으로 이루어 진 길/한 칸 한 칸이 숨 가쁜 오르막길이다/어!/갑자기 막힌 길/겨우 2mm의 좁은 공간이/그랜드캐년의 계곡으로 다가 온다/그래 건너뛰자/여기서 머뭇거릴 수 없어/ 다시 세우는 더듬이/한 칸 한 칸/찾아가노라면/저기/쌓은 만큼 거두어 놓은/내 곳간이 보인다.’

 졸시 ‘기말고사’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길이 막히는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막히는 길에 얽매여 주저앉는다면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이럴 땐 눈 질끈 감고 건너뛰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쌓은 만큼 거두어 놓은 내 곳간이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등교하는 아이들의 가방 무게만큼 어깨가 무거워 보입니다. 오늘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되니까요. 힘내라고 격려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7. 12. 3

 

172. 못 박기와 못 뽑기

땅 땅/울리는 망치소리/그 끝으로 못이 박히고 있다/ 못 끝의 예리함으로/

찢겨지는 나무의 살이 보인다./‘못은 박는 일보다 빼는 일이 어렵지./

못은 빠져도 상처가 남는 단다.’/ 어머니 말씀/망치소리 속에 들리는데/

자꾸만 빗나가는 망치질/다시 뽑아야 할 줄 알면서/땅 땅/

오늘도 또 못을 박는다.

졸시 ‘못 박기’입니다. 이 시를 꺼내 읽다보니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이 다시 살아와 아물지 않은 상처가 덧났을 때의 아픔으로 가슴이 아립니다. 못은 접합하는 도구라는 명사 외에 ‘못(이) 박히다’라는 관용구로 사용되면 ‘다른 사람에게 원통한 생각을 마음속 깊이 맺히게 하다. 어떤 사실을 꼭 집어 분명하게 하다. 원통한 생각이 마음속 깊이 맺히다.’ 등으로 사용되어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못을 박는 일은 삼가라’는 선인들의 교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못은 목재 따위의 접합이나 고정에 쓰는 물건으로 쇠, 대(竹), 나무 따위의 재료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대궐과 같은 큰 건물을 지을 때 못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연결해야 할 부분은 모두 홈이나 구멍을 파서 서로 짝을 지우고 이어 맞추는 방법도 타의나 강제가 아닌 서로 맞잡아 화합을 이루도록 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어느 불효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이 몹쓸 짓을 할 때마다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어느 날 기둥에 빈 틈 없이 박힌 못을 본 아들이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착한 일을 할 때마다 박힌 못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습니다. 기둥에 못이 모두 뽑혔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얼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기둥에 남은 상처는 어쩔 수 없지만 못을 모두 뽑아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기둥의 상처를 어루만져 본 아들은 다시는 못 박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제 내 가슴에 박혔던 못 하나 뽑았습니다. 못 끝에 딸려 나온 찢긴 살점 하나엔 아직 피가 묻은 채 입니다. 내 스스로 일 년 동안 끙끙거리다 뽑은 못입니다. 늘 깐죽거리던 못을 뽑으니 속은 편한데 만져보니 상처는 그대로입니다. 기둥에 박힌 못보다 가슴에 박힌 못의 상처는 어떻게 아물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잘 치유될 거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2007. 12. 10

 

 

173. 교육환경의 변화

막 출근을 하는데 교장실에서 인터폰이 왔습니다. 교감이 학생의 뺨을 때려 경찰서에 폭력교사로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겁니다. 교장 선생님은 ‘혹시나’ 하며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제 4교시 때 교내 순회를 하는데 체육관 옆 급식소 지붕으로 두 학생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매우 위험해 보여 오라고 한 후 사연을 물으니 묵묵부답입니다. 두세 번을 물었지만 고개만 숙이고 있기에 두 사람 다 목덜미를 한차례 때렸습니다. 그제야 동전 100원을 지붕에 던져 돈을 찾기 위해 올라갔다는 대답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돈 100원이 네 목숨보다 귀하냐.”고 꾸중을 한 뒤 두 사람 모두 볼을 잡고 두어 번 흔들다 보냈습니다. 이 일을 아마 학생이 교감 선생님에게 뺨을 마구 맞았다고 말 했나 봅니다. 자녀가 칭찬보다 꾸중을 들었다면 기분 좋을 일은 아닙니다. 서운한 일이 있다면 전화나 직접 방문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면 될 일인데 자녀의 말만 믿고 학교 교감을 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학부형의 성급함이 서운하기도 하고 ‘40년 교직 생활에 이런 일도 겪는 구나’ 하며 이런 오늘의 교육 현주소가 참담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시대에 교권을 수호해야 할 교육의 수장은 오히려 교원정년을 무려 3년이나 단축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를 위해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했고 그 방법의 첫 순서가 교권을 추락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교사들의 행태를 빌미삼아 ‘담임 선택제’ 운운하더니 ‘촌지교사 고발창구’가 만들어지고 ‘체벌교사 신고센터’ 탄생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교사는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과 불법의 신고 대상으로 추락한 셈입니다.

일기장 검사, 용의 복장 검사, 두발단정지도 등이 인권위원회의 권고 사항으로 확대되어 학생의 인권은 신장되는 반면 교육은 인권에 눌려 교육 본연의 입지   마져 좁아졌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체벌 그 자체를 정당화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로 타이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요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교육 전문가가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는 교사를 당황하게 만들고 상황을 무시한 일방적 책임추궁에 벌써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변명이 길어졌습니다. 김혜자 씨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이 이 나이에 무척 부끄럽습니다. 무겁게 젖은 가슴을 겨울나무 가지마다 꺼내 말리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7. 12. 11

 

174. 자기부정

2007년 대선이 이제 닷새 남았습니다. 연일 각종 매체는 대선주자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말잔치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아플 정도로 가시와 독설만 난무하니 아무리 말잔치라고 하지만 보는 이는 피곤하고 관심이라도 있는 이는 행여 가시에 찔릴까봐 몸을 사리는 형편입니다. 흔히 요즘을 PR시대라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PR시대를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 또는, ‘피 터지게 알려야 하는’시대라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남과 비슷하면 내 존재는 묻히고, 천편일률적인 소개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이해는 합니다만 요즘의 행태는 아무리 봐도 ‘아니올시다’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이 낮아 져야한다”란 성경 말씀은 진리인데 이 진리를 바로 알고 실천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 서글픕니다.

세례요한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를 선지자로 따랐습니다. 구약 이후 400 여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던 유대사회에서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빛도 아니다. 다만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으며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고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라고 높였습니다.

‘사나운 개 콧등 아물 날이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국민이 보는 앞에서 토론은커녕 손톱을 세우고 상대방 할퀴기에 열을 올린 탓인지 토론을 마치자 후보자들끼리 형식적인 악수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속 좁은 저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상대방의 업적이나 그가 내 세운 공약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업적이나 공약이 상대와 비교하고 어떤 점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당당하게 설득하는 그런 광경은 희망사항 일터이지요?

저마다 필승을 다짐하는 홍보요원들의 처절한 몸짓과 경쟁적인 홍보방송이 출근길 교차로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음은 자꾸만 시려오는 아침입니다.

2007. 12. 14

 

175. 뿌리가 잎에게

‘옷깃을 스치는 일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연을 소중히 여겼고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부부관계나 직장과 같이 본인의 의지와 사회적인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혈연이나 우연과 같은 숙명적일 때도 있습니다. 한 번 맺어 진 인연은 일방적으로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최악의 경우 ‘연을 끊겠다’ 선언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변했습니다. 가치의 척도가 물질로 대체 되면서 ‘현대판 고려장’이란 말도 나오고 부모 형제간에도 칼부림까지 하는 廢倫도 가끔씩 생기고 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도 ‘낳을 땐 1촌, 대학가면 4촌, 군대 갔다 오면 8촌, 결혼하면 사돈의 8촌, 애 낳으면 동포, 이민가면 해외동포’라는 말도 유행하더니, ‘며느리의 남편을 내 아들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란 유머 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인연이란 끊으려 해도 여전히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주 가는 실비에 젖어/오소소/네 몸이 떨릴 때/캄캄한 어둠 속에서/나도 신열을 앓는다/하늘까지 달구는 불볕더위/참을 수 없어 힘을 잃고 늘어 질까봐/실핏줄 같은 수맥이라도 찾기 위해/내 눈은 빛이 난다/흔들려서는 안 돼/‘매미’ 같은 바람이 불어도/‘위니아’ 보다 강한 폭우가 내려도/흔들려서는 안 돼/혹 풀잎처럼 누울까봐/혹 갈대처럼 꺾일까봐/두 팔 열 손가락 모두 펴고 버틸 때도 있지만/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노래 들으며/이슬에 젖어/ 촉촉하게 젖어 평안히 쉬는 너를 생각하면/ㅎㅎㅎ.../캄캄한 어둠의 자리에서도/내 눈은 밝게 열리고/무딘 가슴에도 노래가 나와.

졸시 ‘뿌리가 잎에게’의 전문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한 세상을 이어 갑니다. 이 관계는 서로에게 자유롭고 원활한 소통을 원합니다. 그러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위한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맺는 갖가지 인연들 - 부모 자식, 부부, 일가친척이나 친구, 직장 동료, 그리고 오늘 하루도 필연이나 우연히 만나는 수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들도 서로가 감당할 만한 희생을 통해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집을 나섭니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오늘 하루도 나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뿌리와 잎’의 관계처럼 서로를 보듬고 나누는 그런 인연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아침입니다.

2007. 12. 15

 

176. 찜질방 에서

 요즘 저승사자는 고민이 많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면 두려움은커녕 첫 반응이 ‘어 시원하다’라고 하니 지옥 불의 온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헛갈린 답니다. 이유인즉 찜질방이나 사우나에서 모진 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언제부터인가 찜질방이 유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종류도 맥반석, 옥, 쑥, 황토, 참숯, 증기 등 참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객의 취향에 맞는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니 가족이나 契 모임과 같은 경우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동안 맥반석 찜질이 좋다 해서 멀리 예천까지 열심히 다닌 일이 있습니다. 잘 달궈진 맥반석과 마주 앉으면 내 전신에서 쏟아내는 땀으로 인해 육체가 홀가분해 지기도 하고 참기 힘든 열기와 한 번 겨루는 맛도 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달구는 땀과의 전쟁은 해 볼 만하지만 내 안에 일어나는 다양한 마음의 변화는 찜질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面壁을 하고 앉는다/전신에 달려드는 熱氣와/내 안의 뜨거움이 서로 맞닿는 接點/挑戰과 應戰의 시간/단단히 잠긴 빗장을 풀어내어/그리움.com, 기다림.com, 설레임.com ..../하나씩 지워 내면/ 홀가분해 져/空中浮揚이라도 할 터이지만/

비울수록 더 무겁게 가라앉는 몸/쏟아 내어도 다시 차는 循環의 억지가/

언제까지일지/氣盡해 진 몸을 다시 끌고 와/面壁을 하고 앉는다.

 拙詩 ‘찜질방’의 전문입니다.

‘마음’이란 녀석은 아무리 빗장을 질러도 빠져 나가기도 하고, 열어 놓아도 나가지 않으니 난감합니다. 마음이 e-메일이나 한글 문서라면 쉽게 지울 수도 입력할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처럼 불현듯 한자리에 들어와 앉는 날은 독감이 걸리거나 몸살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나 청결한 자 복이 있어 천국이 저희 것이며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과연 내 마음의 자리가 어떠해야 가난하고 청결해 질 수 있을까요? 겨울나무는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지혜를 말하고, 여름을 비워야 가을이 오듯 욕심을 비울 때 우리 삶에도 풍요로움은 찾아온다고 가르치지만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쉽게 버릴 수도 비워지지도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시도 때도 장소도 없이 마음에 이는 회오리바람으로 오늘의 기상도가 흐려질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혼자 찜질방이라도 찾아가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7. 12. 17

 

177. 연탄 갈기

기름 값이 고공행진을 하더니 마침내 서울지역에 휘발유 값이 리틀 당 1,900원이 넘었다는 보도입니다. 기름 값 특소세를 내려 서민들의 가계를 걱정해 줄 것이다 기대했던 정치권은 정권쟁취에만 매달리다보니 서민경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런 와중에 연탄이 인기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연탄은 우리네 서민들에게는 겨울나기의 가장 친근한 동반자였고 喜怒哀樂의 경계를 넘나들던 추억이었습니다. 한 겹 구들장 밑을 흐르는 죽음의 일산화탄소를 등에 진 채 코를 골며 편안하게 잠자는 우릴 보고 놀라던 외국인처럼 한 번 쯤 연탄가스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고 환하게 핀 연탄불 열아홉 구멍을 통해 그 어느 것 보다 화끈하게 우리들의 겨울을 이기게 해 준 것이 없었습니다. 신혼 시절 연탄으로 인해 가졌던 사랑이야기가 불현듯 불을 지피는 것은 계절 탓인지도 모릅니다. 깊은 밤. 손을 호호 불며 아내 대신 부엌에 나갔다가 꺼져버린 연탄을 보는 순간 허탈함이란...  꺼진 연탄을 살려내는 일이나 타오르는 연탄으로 또 다른 연탄에 불을 붙이는 일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서로의 등을 따스하게 하는 일은/아주 작아도/불씨가 있어야 할 터이다/

모든 것 다 맞출 수는 없지만/다만 몇 개라도/눈과 눈을 맞대어/ 소통의 길을 여는 일이다/그리고 오랜 기다림/삭이며 타는 일이다/내면에 존재하는 것들/ 하나 씩 둘 씩 꺼내면서/ 서로를 오래 오래 태우는 일이다/서로가 짐으로 여겨지던 것까지 타 버리면/가벼워지는 몸과 마음/마침내 이것까지 버리는 일이다.

 

 拙詩 ‘연탄 갈기’ 전문입니다.

불씨는 예로부터 神聖視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사는 일이란 늘 가슴에 따스한 불씨를 간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가까이 다가가 마음을 맞추는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맞으면 소통은 절로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미지근하게 때로는 뜨겁게 서로를 달구다보면 마침내 사는 맛을 느낍니다. 뜨겁게 서로를 태우다 하얗게 사그라져 가벼워진 연탄재를 들여다보면 이상하리만큼 홀가분해지는 자신을 만납니다.

연탄의 계절입니다. 까만 몸이 하얗게 바래도록 제 몸을 태우다 마침내 자신마저 버리는 연탄을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2007. 12. 20


  178. 첫눈

 첫눈이 내립니다. 일기 예보는 중부지방에 눈이 내릴 거라 예보했지만 슬며시 찾아온 첫사랑처럼 내 어깨위로 내린 눈이 하얀 웃음꽃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사랑이라 말하니 괜히 쑥스럽고 웃음이 나옵니다. 첫눈은 비유컨대 첫사랑과 흡사합니다. 어느 날 준비도 되지 않은 가슴에 불현듯 들어와 마음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게 하고는 홀연히 아픔이란 보석하나 남기고 떠나거던요.

소리 없이 찾아오는 환희도 사라지는 아쉬움도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며 마냥 서성거리는 기다림도 그렇고. 기다림에 묻어오는 동심과 같은 설레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손가락을 걸지는 않아도 마음을 주고받는 약속도 하고 싶고 그런 약속을 축복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지를 소리 없이 덮는 백색의 순수와 모두를 감싸는 포근함이 사랑과 가장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눈도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기야 사랑마저도 실용주의와 일회용으로 변하는 시대이니 할 말은 없지 만 내리는 눈에 대한 낭만마저 자동차 교통을 방해하는 애물로 치부되고 있으니.... 

 

 당신은 불현듯 그렇게 왔습니다./무거운 하늘뿐 아니라/답답한 가슴을 녹이며 그렇게 왔습니다.//찬바람이 가득 찬 하늘과/앞산마저 시린 이마로 움츠릴 때/당신은 포근한 입김으로 그렇게 왔습니다.//당신은 춤추듯 다가 왔습니다./꽃잎 나르듯 분분한 몸짓/움츠린 내 어깨 위를 다정한 손길로 두드리듯/사뿐사뿐 그렇게 다가와/심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습니다.//

당신은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왔습니다./아직 마른 잎들이 구르는 길과 언덕/

가을 끝을 마무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낙엽의 상처를/ 당신은 조용히 덮어 주며 왔습니다.//당신이 찾아 온 이 계절/그림자 모두 걷어 내어 봄입니다.

 

 졸시 ‘첫눈’입니다. 이 시를 꺼내 읽으면서 하늘의 큰 손길을 생각합니다. 누구도 덮어주지 못하는 이 겨울의 황량함과 아물지 않는 상처들로 인해 쓸쓸해 할 모두를 위로해 주는 것은 아직 눈밖에 없음을 실감합니다. 자연현상인 눈에 감정을 담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촌스러운 생각일 터이지만 말입니다. 허 허 허.

2007. 12. 21

 

 

179. 다듬잇돌

어린 시절, 겨울밤이 길어 잠에서 깨어 뒤척이고 있을 때 어머니는 큰 고모님과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하셨습니다. 고모님은 이웃에 사셨는데 내게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는 분이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당신도 고단한 하셨을 터인데 일찍 홀로된 올케의 외로움을 들어주기 위해 밤이면 건너 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가끔 다듬이질을 하셨는데 이 소리가 때로는 곤히 잠든 나를 깨우기도 하고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나를 그 경쾌하면서도 단순한 리듬으로 다시 잠들게 하는 마력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다듬잇돌은 다듬질을 하는 필수적 도구입니다. 오늘처럼 세탁소가 보편화 되었거나 좋은 다림이가 없던 시대이니 옷감을 고르게 펴고 다듬는 일에 다듬잇돌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다듬이질을 하려면 먼저 푸새를 한 세탁물을 일단 완전하게 말립니다. 이렇게 하면 풀이 서고 올이 잘 펴지기 때문이지요. 다음에 물을 축이는데, 물을 손에 묻혀 골고루 뿌리거나 물을 입으로 뿜기도 합니다. 물을 축인 빨래는 대강 접어서 빨랫보에 싸놓아 물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잠시 기다린 후에 솔기를 맞추어가며 다시 접습니다. 이것을 다시 빨랫보에 싸서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한참 동안 밟아주면 온기가 빨래에 고루 퍼지고 구김살도 어느 정도 펴집니다. 이렇게 한 다음 다듬이질을 하는데, 잘 다듬어진 옷감은 다림질한 것 이상으로 매끈하고 구김도 잘 지지 않습니다. 다듬이질이라는 게 여인네들에게는 밤마저 쉴 수 없는 하나의 노동일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억압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방망이질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음 놓고 풀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주름진 고된 시집살이의 아픔을 곱게 다스리고 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딸을 출가시킨 친정아버지가 1년이 지나면 다듬잇돌을 짊어지고 사돈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왜 다듬잇돌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상징성을 이해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할 뿐입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아직은 밤이 긴 계절입니다. 가족마저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눌 기회도 적어지고, 모여 있다 해도 TV 채널에 긴 밤을 맡기는 요즘이고 보면 간간히 환청으로 들리는 다듬질하는 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 때문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지난 한해 때 묻고 구겨진 것들 마음속으로 다듬질 하며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8. 1. 8

 

180. 돌을 닦으며

 어제는 충청남도 태안의 천리포를 다녀왔습니다. 치솟는 기름 값이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더니 이번엔 그 비싼 기름을 바다에 버려 서해안 주민들을 절망으로 몰아간 어처구니없는 현장을 봤습니다. 이미 앞선 봉사자들의 수고로 해안선은 많이 깨끗해졌지만 아직 모래아래는 기름들이 배어있고 따개비 같은 작은 조개류들의 죽음을 보며 이 거대한 人災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새벽부터 긴 해안선에 빼곡하게 들어앉아 땀 흘리는 손길을 보면서 인간의 손이 가진 양면을 생각했습니다. 이 작은 손으로 엄청난 일을 저질기도 하고 또한 그 손들이 모여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재앙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뉴스 화면에 비친 백색 인간 띠를 현장에 와서 확인하면서 역시 우리는 위대한 국민임을 실감했습니다. 

 돌을 닦았습니다./절망이란 이름의 검은 때를/ 따뜻한 손들이 닿는 곳마다/

돌은 고맙게도 제 살빛을 드러냅니다./태안의 가슴/ 젓줄마저 막힌 젓 무덤에/

이젠 서서히 피가 돕니다./돌을 닦다가 문득/물을 끓여 왜놈에게 붇던/진주성 돌쇠네 아범을 만났습니다./치마가 다 닳도록 돌을 나르던/행주산성 순이네 엄마도 만났습니다./돌 하나 만지며/내 가슴에도 이어 흐르는 그들의 온기를 느낍니다./아직은 밀려오는 고난의 파도/손잡고 막아선 저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띠/땀방울 떨어진 자리마다/새살은 새싹으로 돋아나고 있습니다./기름걸레 분주한 해안선을 따라/희망의 새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졸시 ‘돌을 닦으면서’ 입니다. 이 시를 쓰면서 느낀 것은 한 민족의 역사는 그 역사의 현장 속에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의식’이 좌우한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우리만큼 수난의 역사를 가진 민족은 세계 속에 드물 겁니다. 5,000년의  세월을 두고 임란과 호란과 같이 기록된 전쟁의 역사 외에 기록되지 않은 왜구의 침략까지 더한다면 무려 3,000회가 넘는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비마다 이 땅을 지킨 이들은 한 결 같이 이름 없는 民草들이었다는 걸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 서해안의 상징인 서해대교위로 저녁 해가 붉게 그림처럼 걸리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일은 하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마음은 저녁 해처럼 뜨거워지는 것은 나도 이름 없는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요.

2008.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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