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경제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의 우선순위
졸업과 입학의 계절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이 맞물려 학교는 분주합니다. 한 해를 반성하고 새 학기를 계획하는 등 매사에 매듭을 짓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런 저런 매듭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出生, 成年, 結婚, 死亡 따위와 같은 큰일에서부터 入學, 卒業과 같은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일생 동안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이를 프랑스의 인류학자 방주네프(Van Gennep, A.)는 ‘通過儀禮’라 불렀습니다.
우리 학교는 신입생이 입학식과 함께 교복을 착용합니다. 교복문제로 많은 전화를 받습니다. 이유는 신입생의 경우 하복부터 착용하고 2학기 후반에 동복을 착용하면 청소년의 성장에도 맞고 경제적으로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부모의 요구에 대부분의 학교는 하복부터 착용합니다. 교복에 대해 경제적 가치를 우선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입학식이라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한 개인의 정신적 다짐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교육적 의미를 더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입학식 앞서 예비소집을 하고 건학 이념, 교훈, 교화, 교목에 대한 교육은 물론 입학식에 부를 교가까지 지도합니다. 입학식도 하기 전에 요란이냐는 비난도 있지만 교육이란 아주 작은 일도 소홀 할 수 없을 뿐더러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개인이 학교라는 공동체 속에 속한 구성원으로 자긍심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입학식 날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관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힘차게 교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학부형, 학생, 교직원 모두 한 가족임을 느낍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육에 경제적 논리가 들어와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령 교사 한 명이 퇴직하면 젊고 유능한 교사 두 명을 채용할 수 있다하여 학부형의 지지를 얻었고 마침내 정년단축과 명퇴를 인위적 유도하는데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엄청난 교사의 부족을 낳았습니다. 당황한 당국은 거꾸로 정년 또는 명퇴로 퇴출(?)한 교사를 책임없이 다시 교단에 서게 하는 헤프닝을 벌렸고 결국 학부형들은 모른 채 교단은 황폐화 된 경우입니다.
우리 삶 속에 경제적 가치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학교만은 교육적 가치에 우선해야 합니다. 아직 교복을 갖춰 입진 않았지만 신입생들이 모여 열심히 교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틀 후 단정한 교복을 입고 입학식에 참가할 그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아침입니다.
2008. 2. 29
185. 눈치 약
순 우리말로 눈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을 미루어 알아내는 것’. 또는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태도’로 나와 있습니다. 영어사전에는 ‘sense’로 ‘감각, 오감(五感)의 하나, 감각 기관으로 막연한 느낌, 기분, 인상, …감, 심정, 지각’ 등으로 해석되어 우리말 ‘눈치’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눈치라도 감각기관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른 경우도 있을 것 같아 참 동감이 갔습니다. 이런 눈치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 눈치가 너무 빠른 ‘눈치꾸러기’가 있는가하면 눈치가 몹시 무디거나 너무 없어 ‘눈치가 발바닥’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무래도 눈치꾸러기가 훨씬 유리한 세상임이 틀림없습니다.
올 해로 꼭 눈칫밥(?)을 먹은 지 40년이 됩니다. 철없는 나이 20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한 바닥에서만 40년을 보냈으니 누가 뭐라고 해도 눈치엔 9단이 되어야 하는데 되돌아보니 경지는커녕 초보신세도 면하지 못하고 발바닥 짓만 하고 있으니 참 한심 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경우(境遇) 또는 경위(涇渭)를 따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은 사리나 도리 또는 놓여 있는 조건이나 놓이게 된 형편이나 사정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이때 사리의 옳고 그름이 이러하고 저러함에 대한 분별은 참 중요합니다. 경우에 맞을 때 우리는 흔히 합리적(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이라 하여 결정 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게 세상일입니다. 비록 조금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경우에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일은 자주 결정되고 실행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눈치입니다. 여기서 내 눈치는 경우와 합리성을 따지다가 번번이 낭패를 보기 마련입니다. 40년을 겪으면서도 늘 같은 꼴을 당하고 있는 걸 보면 난 정말 완전히 맹치(盲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아침 입니다. 이미 결정 된 사항이지만 경우(境遇)에 맞게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여겨 나름대로 오래 생각하여 말 했다가 결과적으로 눈치 없는 일 하나 더 만들고 만 셈입니다.
오늘이 절후로 경칩입니다. 만물이 눈을 뜨는 때입니다. 바깥에 나서니 겨우내 벗은 나무도 낯빛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새잎을 준비하는 저 나무도 지금쯤 날씨의 눈치를 보고 있을까요?
오늘 퇴근하면서 약국에 들려볼 작정입니다. 때는 늦었지만 혹 눈치약이라도 있다면 한 번 쯤 처방을 받아 볼까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허허허.
2008. 3. 5
186. 관심이라는 묘약
대동 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날 지하실 문을 열었더니 겨우내 아내가 물을 주며 정성을 쏟은 화분들이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분을 살펴보던 중 한 쪽 구석진 곳에 놓여있던 꽃나무가 많이 말라있었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라 그동안 무심했음을 자책하며 나무에게 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말랐으니 포기하라 했지만 꼭 살려야 한다며 정성을 다하는 듯했습니다.
그 후 연산홍이 제일 먼저 화려한 꽃소식을 전했고 다른 화초도 제 빛깔을 내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른 꽃나무는 소생의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도 입을 띈다는 경칩(驚蟄) 날입니다. 말라버린 나뭇가지 뿌리 쪽으로부터 파란 싹 두 개가 눈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자기의 관심이 꽃나무를 살려냈다고 기뻐했고 나 또한 생명의 경이로움에 놀랐습니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 말합니다. 프랑스 속담에도
‘관심은 친구를 만들지만 무관심은 적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關心)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라는 뜻으로 인간관계에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쳇말로 관심이 있어야 그리움도 일어나고 사랑도 이루어지며, 관심이 있기에 시기. 질투, 미움도 생기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옛 성현들이 말한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라는 사단(四端)도,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도 따지고 보면 관계를 통한 관심으로부터 출발일 것입니다.
이미 마른 나무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린 사랑을 위해 아직도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벗이 하나 있습니다. 이젠 미련 때문에 오는 상처를 홀가분하게 벗어버리라고 권해 보지만 그 상처조차 사랑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비록 가지가 마르고 잎이 떨어져도 어딘가 자기를 향한 사랑이 살아남아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오늘 파랗게 새 생명이 살아오는 화분을 보면서 내 일이 아니라고 너무도 쉽게 처신한 경솔함이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친구의 지극한 관심이란 묘약이 사랑의 싹을 다시 피워 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꼭 시간을 내어 ‘힘내라’는 전화를 다시 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8. 3. 7
187. 꽃망울을 여는 홍매화 가지가 아래서
모처럼 야외에 나갔습니다. 계절이 나도 모르는 사이 이만큼 왔습니다. 자연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제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 수양버들 빛깔이 황금색이군요.”
감탄하는 아내의 말에 눈을 돌려 보니 정말 삼단 같은 가지마다 봄빛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 한 참을 걸었습니다. 앞산의 이마도 많이 느슨해 졌고 길가 작은 개울에도 물소리가 시를 읽고 있습니다. 흔히들 봄이 만물을 소생시킨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자연이 저마다 봄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봉해둔 딱딱한 껍질을 깨려고 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 끝까지 물길 내기에 바쁘고, 그리고 새로운 꽃눈을 열기위해 가장 따사로운 햇살을 퍼 담기에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그동안 사는 일에 바빠 무심했던 뜰에도 봄이 한창입니다. 양반나무라 자처하는 석류와, 대추나무를 제외하고 홍매화, 산수유, 자목련, 철쭉, 진달래는 물론이요 수수꽃다리(라일락)도 봄빛이 완연합니다. 모두들 저마다 방법으로 봄을 준비하기에 분주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연은 꽃 하나를 피우기도 다양하며 변화무쌍하면서도 질서 있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발견한 것은 지난 해 낙엽이 말끔히 떨어지지 않은 나무 일 수 록 새싹의 트임이 느리거나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생리를 모르는 내 주관적 견해이겠지만 ‘자연도 스스로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새로운 계절의 준비에 걸림돌이 되는 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를 바꾸어 인관관계와 연결하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계절을 나누고 때 마다 필요한 통과의례를 두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정리하도록 하고 있나 봅니다.
봄은 왔는데 벗기려 해도 잘 벗겨지지 않는 옹색한 마음의 때와 아물다가는 또 아물지 않고 떨어지는 작은 상처 딱쟁이 하나 있어 늘 긴장된 마음으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어색하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결국 이렇듯 끙끙대며 불안한 것은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임에도 말입니다.
해맑은 얼굴로 하루하루 꽃눈을 여는 홍매화 연한 가지가 부러운 아침입니다.
2008. 3. 13
188. 자판기 앞 14초
내가 앉은 맞은편에 사람들이 애용하는 커피 자판기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유심히 관찰하면서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동전을 넣고 원하는 종류의 버튼을 누르면 빨간 불이 켜지면서 기계는 작동을 합니다. 모든 것이 적정량만큼 나오면 ‘삐-’하는 신호음과 함께 빨간 불이 꺼지고 모든 동작이 끝납니다. 실험을 했더니 동전을 넣고 종료 신호음이 날 때가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14초입니다. 그런데 10명이면 7명 정도는 ‘삐-’하는 신호음이나 불이 꺼지기 전, 커피 잔을 뽑는 경우가 많고 그 중에는 커피와 물이 나오고 있는 컵에 손을 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사람들의 성격이 많이도 급하구나 하는 것을 실감합니다.
어느 싱거운 사람이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서 관찰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소변기 앞에 서기 전에 이미 지프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급한 용무 때문 일 경우도 있지만 용변을 다 본 사람들 중에도 지프를 올리고 나오는 경우보다는 그냥 올리면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결국 습관적인 행동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네 선조들은 바빠도 뛰지를 않았고 개헤엄은 치지 않았으며 더구나 팔자걸음은 결코 속도감이 있는 자세로 맞지 않는 걸 보면 가난했어도 생활에 여유를 가졌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서두르는 습성이 생기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빨라서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을 스피드 시대라 부릅니다. 속도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말입니다. ‘대략’ 이란 말이 통하던 아날로그적 사고가 아니라 분 초 단위도 나누는 디지털적 사고를 요하는 시대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스피드 덕을 단단히 본 나라입니다. 서양이 수백 년을 걸려 이룬 민주화와 산업화를 불과 30-40년 만에 이루었고 糊口之策이 최우선 과제였던 우리가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는 나라로 성장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빨리 먹은 콩밥 똥 눌 때 보자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급히 서두르면 탈이 생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성급하게 이루어놓은 일 뒤에 문제점들이 아프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되돌아보며 살필 여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빨리 패지 않는다고 벼 이삭을 손으로 뽑아 올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판기 앞에 섭니다. 동전을 넣고 버턴을 누르면서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흐르는 14초의 여유를 참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종이컵에 손을 대는 나를 보면서 어이없어 웃는 아침입니다.
2008. 3. 19
189. 다시 동성 분교장에 서서
영동초등학교 동성분교장에 다녀왔습니다. 학교를 둘러서 선 산천은 봄빛이 가득한데 폐교라는 이름표를 달고 폐허처럼 변한 운동장과 교실에는 가슴시린 바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1995년 5월 18일. 꼭 13년 전에 문학행사로 찾아 간 동성분교장은 햇살조차 따스하고 아늑했습니다. 전교생 16명의 어린이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이 마치 이웃 꼬마들이 모여 소꿉놀이를 즐기는 듯 한 풍경화였습니다.
졸시 ‘영동국민학교 동성분교장에서’는 그 날 쓴 글입니다.
빈 교실들이 길게 누워/낮잠이 들었다/울타리엔 찔레꽃들이/물소리에 하얗게 웃는데/전교생보다 더 많은 토종닭들이/햇살을 쪼아대는 운동장/
푸라타나스 푸른 그늘/새소리 들으며/전교생 열여섯 명 어린이 회의/
전학 간 순덕이 편지를 읽는/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퇴강 물 따라 도시로 간/아이들 모두에게/ 진달래 빛 봄 편지를 쓰자는 성환이 의견/열여섯 손뼉소리가 깃발처럼/하늘을 오르고 있었다.
둘러보니 산과 들은 온순하고 낙동강에 이르는 샛강을 끼고 돌아 흐르는 물 또한 넉넉한데 숲과 나무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소리가 정겹습니다. 여긴 공해도 오염도 없어 공기는 맑고 사시사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정작 살아야 할 사람들은 산업화 도시화를 따라 고향을 등지고 마침내 희망과 꿈을 기르는 배움터마저 폐허의 흔적만 남긴 채 누워있어 우리 농촌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렸습니다.
동성초등학교는 1963년 금곡국민학교란 이름표를 달고 개교한 이래 1996년 30회 졸업생 6명을 마지막 배출하기까지 33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더구나 1970년대에는 전교생이 300명이 훨씬 넘는 신나는 배움터였습니다. 한참 서 있으니 둘러선 울타리와 플라타나스 나뭇가지 사이에서 300명의 아이들과 이 땅을 지키던 학부모들이 함께 부르짖는 함성이 환청으로 다가옵니다. 그 환청은 미래를 여는 농촌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환청과 환상도 잠시, 현실은 2008학년도에 경상북도에만 또 얼마의 분교가 폐교되고 본교가 분교로 격하될지 봄빛 찬란한 이 땅이 어둡기만 합니다.
학교는 자라는 아이들에겐 미래를 여는 꿈동산이자 지역인 들에게는 삶의 희망을 가꾸는 문화의 센터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구약 성경 에스겔서의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어 다시 부활하는 환상처럼 이 땅에 버려진 수많은 동성초등학교들이 아이들의 웃음꽃으로 가득 찰 희망의 날을 꿈이라도 꾸고 싶은 아침입니다.
2008. 3. 20
'나의 문학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에 피는 코스모스 (0) | 2008.07.10 |
---|---|
학창시절 (0) | 2008.04.30 |
안주유감 (0) | 2008.02.20 |
시험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0) | 2008.01.28 |
아침을 여는 글 81-90 (0) | 2007.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