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안주유감

빛마당 2008. 2. 20. 12:50

 

181. 따뜻한 달걀

 아침 기온이 올해 들어 가장 낮아 철원 지방 최저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졌다는 보도입니다. 추위에 잔뜩 오그라진 종종걸음으로 상주농협 남원동 지점에 들렸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객과 직원들이 웃음꽃으로 사무실 안을 훈훈하게 대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들 릴 때마다 받은 느낌지만 지점장을 비롯한 직원 모두가 고객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입니다. 꾸밈이 없는 소탈한 웃음과 이 지역 정서에 맞는 친절이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거피나 녹차 대접은 물론이려니와 여름철에는 잘 익은 토마토나 참외를 쟁반에 담아두고 고객이 기다리는 시간을 배려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유별나지 않으면서도 창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따끈한 붕어빵을 여러 봉지를 사왔습니다. 농협 앞에서 붕어빵을 굽는 아주머니가 몸이 아파 며칠 장사를 하지 못했다며 걱정을 하더니 오늘 아침은 따끈한 달걀을 삶아 고객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웬 달걀이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더 정겨웠습니다. 겨울철엔 일찍 오시는 손님 중에는 식사를 하지 않은 분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을 위한 배려 차원이랍니다. 그리고 참외나 토마토, 달걀과 같은 것은 우리 농협의 주인인 農.養畜 농가의 것이니 이를 애용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설명입니다.

 감동이란 사전적 의미는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 합니다. 이 때 크게 느끼는 것은 감동을 주는 요인이 크고 대단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요인은 작아도 개인의 정서에 따라 크게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 감정을 말합니다.   

 농협이 농민을 위한, 고객을 위한 농협이 아니라 농협인을 위한 농협이라고 세간에서는 질책의 소리도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업계에 비해 서비스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찾는 이곳은 ‘고객은 왕’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다정한 이웃이요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다는 것이 더 살갑고 정이 갑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꼭 볼일이 없으면서도 가끔씩 이곳에 들려 커피 한잔 더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엉터리 고객이기도 하니까요.

 계란 하나를 손에 넣으니 계란이 주는 따스함과 이곳 직원들의 배려가 두 배로 증가되어 마음까지 훈훈합니다. 사무실 문을 밀고 나와 한 참을 걸어도 시린 겨울추위가 이 따스함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들은 ‘해님과 바람’이라는 우화가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2008. 1. 18

 

182. 44,444

 제목이 무슨 암호 같습니다. 하지만 암호도 아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의 숫자 ‘666’ 과 비슷한 내용도 아닙니다. 이 숫자는 단지 오늘 내 승용차 주행 거리가 막44,444km를 지났다는 표시입니다. 계기판을 보다가 주행거리가 44,442km임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2km만 더 가면 44,444km가 되겠기에 호기심도 있고 해서 마지막 2km를 우리 집 차고에서 마무리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혼자 생각이었을 뿐 내 차가 44,444km에 도달하는 순간은 우리 집 차고가 아닌 상주에서 겨울바람이 가장 강한 북천교 위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가 사는 삶 도 이와 별로 다름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정말 별것도 아닌 일도 내 뜻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획의 적정성,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의지력, 또한 외적 환경이 필요하며 여기에 ‘기회’와 같은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야합니다. 기회란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적절한 시기나 경우’를 말하는데 평범한 우리로는 그 ‘적적한 시기나 경우’를 포착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 박물관에는 커다란 날개도 모자라 발목에 작은 날개가 달린 조각이 있는데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라는 기회의 신상입니다. 이 신은 앞머리만 무성할 뿐 뒷머리는 번쩍번쩍하는 대머리인데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기회를 만났을 때 쉽게 잡을 수 있게 함이고, 대머리인 까닭은 일단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합니다. 신화의 내용과 그 형상이 時事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기회란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또 다른 모습으로 몇 번이고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기회에 대한 미련으로 다가오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44,444km의 계획이 갑작스러운 일로 실패했지만 다시 55,555km가 될 때는 분명히 우리 집 차고에서 실현시켜 보리라고 다짐을 합니다. 승용차의 계기판을 보니 벌써 44,478km를 돌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1,077km가 남았습니다. 참 별 일도 아닌 일에 계획을 세우고 있는 참 별 볼일 없는 나를 보며 웃는 아침입니다. 허허허

2008. 1. 25


183. 按酒 有感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부터인가 안주에 신경을 씁니다.

나야 원래 술을 마시지는 데는 煎餠(?)인데도 주제 넘는 예술을 한답시고 이 곳 저 곳 기웃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지금도 상주에는 ‘문화원 골목’이 있습니다. 문화원이 이 골목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외지 사람이 이 골목 이름을 들으면 서울 ‘인사동 골목’정도로 연상하겠지만 사실은 문화원을 가운데 두고 골목 좌우로 술집들이 진을 치고 있는 묘한 골목입니다. 문화원의 위치가 그러하니 각종 전시회나 강연회가 열리면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출입이 다반사입니다. 첨엔 몰랐는데 언제부터인가 주모로부터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주당들은 안주를 매우 아끼는데 이런 걸 모르는 나 혼자 안주를 거의 먹어치우고 있으니 그 집 매상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입니다.

 어느 날 수삼과 꿀이 안주로 나왔기에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한 개를 빨리 먹고 두 번째 젓가락이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허물없이 지내는 후배가 ‘형님 제발’을 외쳤습니다. 모두 한 바탕 웃고 넘겼지만 술값보다 비싼 안주를 함부로 먹는 실수 그때부터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퇴임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몇 몇 지인들이 모시고 마련한 술자리에 오랜만에 참석했습니다. 음료수만 계속 마시는 나에게 안주를 권합니다. 문화원 골목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모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웁니다. 곁에서 누군가 이 집의 안주는 무한 제공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푸짐한 안주를 바라보며 이런 곳도 있는가하고 놀랐습니다.

 세상인심이 10년 전보다 더 각박해 지고 이로 인해 살맛이 줄어드는 요즘에  당연한 인심이 이렇듯 귀하게 느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래도 주모의 넉넉한 인심이 좌석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안주 대신 다른 곳에서 효과(?)가 오르고 있습니다. 곁에서 누가 주모의 고단위 경영수법이니 감격하지 말아도 좋다고 핀잔을 주지만 참 그래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매상보다 손님과의 인연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배려하는 주모를 보면서 살맛이 살아나는 것은 어디선가 잃어버린 귀중한 보물을 다시 찾은 것 같아 모처럼 마음 놓고 먹는 안주만큼이나 가슴이 흐뭇했습니다.

2008.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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