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보이지 않는 눈을 피해서
마음을 놓고 달리는 길. 갑자기 내 머리 위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터집니다. 번쩍이는 섬광이 무심코 달리는 내 가슴에 놀람으로 박힙니다. 예기치 못한 장소에 속도위반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그 예리한 눈으로 내 차의 속력을 체크한 모양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대단합니다. 캄캄한 밤, 시속 120km 이상의 속도를 어김없이 잡아서 카메라로 촬영을 해버리다니. 기계의 섬세함과 예리함에 혀를 내두를 뿐입니다. 차 앞에 달아 놓은 ‘네비게이션’이나 ‘GPS'와 같은 기계들을 보면서도 이런 감탄을 합니다. 달리는 차 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인공위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교신 말입니다. 결국 인간이 만든 기계에 스스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쓴웃음이 나옵니다.
문득 계시자 요한이 밧모 섬에서 기록했다는 예언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은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요한계시록 6장 12-14). 1세기 경의 시대적 상황에서 바라본 요한의 눈에 비친 세상 끝 날의 모습은 얼마나 놀라움이었을까요. 아들의 결혼식 때 찍은 비디오를 보면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인간도 기록해서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삶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예리한 눈에 다 찍혀 마지막날 말씀그대로 낱낱이 밝혀진다면 생각만 해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으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의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요한은 기록을 했을까요.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며칠 안으로 날아올 범칙금의 통지서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범칙금 통지서는 조금 아깝더라도 내면 되지만 이런 내 행위에 대한 하늘의 통지서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곰곰이 생각합니다.
2007. 1. 24.
82. 내 생각과 다른 하늘의 생각
어떤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동네를 지나다 토담 위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잘 익은 호박을 보면서 중얼거립니다. ‘하나님도 바보시지. 저렇게 가는 호박줄기에 저토록 큰 호박을 달아 놓다니...’. 한참을 가다 산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거기엔 상수리나무들이 마을을 향해 줄어지어 있었습니다. 문득 길을 멈춘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바보야. 이렇게 튼튼한 나무에는 작은 도토리를 달아놓다니..허허’. 한 참 길을 가던 나그네가 아주 우람한 상수리나무 그늘아래 봇짐을 내려놓더니 피곤했던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를 잤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딱’ 하고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 나그네의 콧등을 때렸습니다. 깜짝 놀란 나그네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때그르르’ 구르는 도토리를 바라봤습니다. 그는 이윽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상수리나무에 작은 도토리를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호박처럼 큰 열매를 달아 두었더라면 제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사를 恣意的으로 해석합니다. 이 자의적 생각이 교만을 부르고 이 교만이 질서를 파괴하는지 모릅니다. 굳이 노자의 無爲自然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하늘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완벽한 자연을 질서 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이 질서를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 실낙원을 초래했습니다. 마침내 인류문명은 역설적으로 인류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과 같은 경고의 메시지가 이미 우리 앞에 이미 도착해 있음에도 한 쪽에서는 ‘생명공학’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生者必滅은 하늘의 뜻입니다. 흐르는 물이 언덕이나 바위를 만나 잠시 거슬러 오를 수 는 있어도 결국 물은 아래로 다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大寒추위는 꾸어서도 한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零上의 기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뜻해서 좋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내 생각이 오늘 얼마나 하늘의 생각을 거슬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2007. 1. 24
83. ‘바랄 望’자 써보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번씩 문자를 확인하며 이제는 간간이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그런 마음이라고.
바쁠忙, 잊을忘, 망할亡 이라던데.......
마음 하나는 고요히 지킬 수 있기를.
몸만 바쁘고 마음은 한가한, 그래서 바랄望으로 .....’
비록 몇 줄 안 되는 글이었지만 글의 행간에는 태연한 척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 갈 수 없는 한 ‘그리움’에 대해 안타까움이 몸살 끼로 돋아 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일까요? 남의 아픔이 상처가 아니라 보석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玉篇에 ‘망’자를 찾아보니 ‘망할 亡’, ‘망령될 妄’, ‘바쁠 忙’, ‘잊을 忘’. ‘바랄 望’, ‘아득할 茫’, ‘그물 網’, ‘없을 罔’ 등등 많기도 합니다.
그랬습니다. 바쁘면 잊을 수 있고 잊으면 잊혀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라는 일은 잊을 수도 잊혀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서로를 바라는 사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바램과 절실함이 매 순간 순간마다 솟구쳐 올랐기에 은하수와 같은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지 않았나 모릅니다.
오늘 따라 어두운 하늘입니다. 밤은 차라리 어두울수록 참 아름다운가 봅니다. 끝이 보일 리 없는 하늘에 보석을 박은 듯 별이 반짝입니다. 누군가 ‘별이 반짝이는 것은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꿈을 쏘아 올리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이던 우정이던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바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질 것 같습니다. ‘바랄 望’자로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그 분에게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며 나도 저 까만 하늘에 ‘바랄 望’자 하나 커다랗게 써봅니다.
2007. 1. 26
84. 새로운 ‘아쉬움’을 만들기 위하여
오늘은 마음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허전하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36년 간 모교에 봉직하면서 모교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사립학교에서 교장의 자리는 일반 공립학교와는 다르기에 ‘이번에는...’ 하고 사실은 욕심을 냈습니다. 이사장님의 배려로 1년 6개월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예기치 않은 공문이 왔습니다. 올해부터 1947년 9월 1일 이후 출생한 자라는 제한이 생긴 겁니다. 내 생일이 1947년 1월 생이니 6개월의 부족으로 자격이 사라진 셈입니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날 만나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초등학교에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도 4-5년 전에 이미 교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아쉬움은 남습니다. 흔히 말하는 ‘宅號라도 바꾸었으면’ 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쉬움은 후회와 다른 것’이라고.... 초등학교 근무 3년, 교장선생님의 잔소리와 잔일들이 너무 싫어 중등으로 옮겼지만 마지막 3년에는 나를 잊지 못하고 시시 때때로 기억해주는 졸업생도 배출했습니다. 초임 발령의 철부지 교사가 보낸 3년도 아쉬움은 남았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중등의 36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좋아 일을 하고, 학생들이 좋아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전시회다 발표회다 하며 24시간이 모자라 쪼개며 정신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有名無實한 동창회를 맡아 새롭게 동창회를 조직하고 명부를 만들고, 20년 간 활성화에 東奔西走했습니다. 그래서 선후배는 물론 동창회의 역사를 구슬 꿰듯 알 수 있게 되었고, 남산학원 50년을 상징하는 ‘南山學園50年史’를 1년의 노력 끝에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자료수집, 원고 작성, 워드 작업 및 편집에 이르기까지 일은 하면 할수록 즐거웠습니다.
오늘 2007학년도 인사를 발표하면서 교장의 꿈이 깨지는 허전함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남겨진 2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계획할까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흔히 말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깁니다. 후회는 자신을 과거라는 공간에 머물게 하지만 아쉬움은 나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또 하나의 아쉬움을 위해 허전함을 털며 일어섭니다.
2007. 1. 29
85. 눈 속으로 떠나는 추억 여행
눈이 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눈이 오면 모두들 좋아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합니다. 눈칠 걱정, 운전 걱정, 이로 인한 교통사고, 그리고 주부들은 빨래 걱정..... 하지만 오늘만은 이런 걱정을 떨쳐내고 펄펄 날리는 눈 속으로 한 발 내딛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뽀드득’하고 들리는 그 특유의 감촉을 발자국에 느끼며 걷노라면 금방 새로운 세계로 빠져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속엔 눈으로 이루어진 아련한 추억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비와 바람으로 인해 이루어 진 사연도 많지만 눈으로 이루어진 사연들은 눈만큼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의 애틋함이나 외로움의 적막함이나 그리움의 아린 기억들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면 추억의 언덕을 넘어 정신 없이 달려오는 얼굴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금새 그 나라로 달려가는 날개를 답니다. 온통 축복처럼 하얗게 장식된 동화의 나라에서 당신은 새로운 동화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릅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잔뜩 흰 눈을 덮어쓰고 있을, 그리고 아직 투박한 긴 의자가 남아 있을 간이역이나, 산새들이 눈 위에 조심스럽게 찍어 놓았던 그 산자락 오솔길이나, 빛 바랜 벽지가 더 마음에 들었던 한적한 시골 찻집을 향해 두툼한 외투를 준비하겠지요.
우리의 추억 속엔 아름다운 향기만 있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추억이란 마법의 상자에 담아두면 가슴 아렸던 사연도 하늘이 무너지던 절망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삶의 향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눈이 오는 날은 저마다 추억을 통해 삶의 향기를 충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쓴 ‘첫눈이 내린 날’이라는 시를 꺼내어 읽어보았습니다.
나무는/가지를 모조리 벌리고 서서/모처럼 솜옷을 갈아입고//서릿발 까칠하게 돋은/보리밭도/따스한 이불을 덮었다.//쓰레기 더미도/새 단장을 한/어디를 보아도/하얀 세상//하루만이라도/만나는 사람들//찬바람에 시린 눈자위에/조롱조롱 웃음이 달리고//저마다/ 까마득 잊었던/동심이 솟는지//거리거리엔 모두/즐거운 어린이 날이다.
그렇습니다. 세월의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리고 오늘은 아득히 잊었던 동심을 찾아 떠날 차비를 해 보렵니다.
2007. 2. 1
86. 아내의 안경
모처럼 아내와 함께 안경점엘 갔습니다. 그동안 아내는 작은 글씨를 잘 읽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아내는 시장에서 5,000원하는 돋보기를 사다가 책을 읽었습니다. 딸아이 둘이 안경을 쓰게되어 안경점엘 가끔은 가게되고 나 또한 어느 날인가 ‘난시’라는 판정을 받아 안경을 쓰게 되었지만 아내의 시력에 대해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내에게 한 번도 안경점을 가자고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 나에 비해 아내는 늘 관심을 써 주었습니다. 1년에 한 두 벌은 꼭 정장을 마련해 줍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깔끔해야 하고 특히 나이가 들수록 단정해야 한다면서 주의도 줍니다. 그런 아내의 말이 당연하게 들렸고 아내의 변변하지 못한 외출복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살림하는 사람이니까’하는 생각이 내 심중에 자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직자들에게 ‘복지비’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 날도 나를 위한 복지포인터는 충분하게 채우고도 여유가 남아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책상 앞에 놓인 아내의 5,000원짜리 안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언제 그랬는지 다리 한쪽에 반찬고가 하얗게 붙여져 있습니다. 싫다는 아내를 억지로 대리고 안경점엘 갔습니다. 시력을 체크하니 이미 난시와 원시가 겸해있었습니다.
아내는 돋보기 하나로 충분하다 했지만 전문 기사의 권유로 난시와 돋보기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걸로 택했습니다. 안경을 찾아서 나오는 날 안경하나로 훨씬 달라져 보이는 아내를 봤습니다. 남들이 보면 뭐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웃겠지만 그랬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도, 꼭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훨씬 밝고 바르게 볼 수 있는 아내를 보며 따라서 나도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경험을 했습니다.
2007. 2. 1
87. 세월이 그린 자연의 그림
어떤 여인이 거울 앞에 앉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목 아래 보기에 흉측한 것이 눈에 보입니다. 만져보니 꼭 자기 배꼽처럼 생겼습니다. 여인은 벌떡 일어나 문을 잠그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속옷을 벗다가 또 놀랐습니다. 분명히 단전 위에 있어야 할 배꼽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름살을 펴기 위해 자꾸만 살갗을 위로 당겨 올리는 성형수술의 후유증으로 단전 위에 있어야 할 배꼽이 목 아래까지 딸려 올라 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소리이지요.
누구나 늙기 싫고 젊은이의 피부를 유지하려는 것은 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세월이란 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잠시는 막을 수 있지만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나무의 세월이 나이테에 새겨진다면 사람의 세월은 대부분 얼굴에 나타납니다. 바쁘게 사노라 무심히 보내다가 어느 날 거울 속 내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뚜렷이 발견하면 놀라게 됩니다. ‘안티에이징(antiag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런 놀라움을 해결해 보겠다고 주름살을 없애고 피부 노화를 방지하려는 노력들을 일컬어 온 말입니다. 아름다움엔 자연미와 인공미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공미보단 자연미가 근원적 아름다움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말한 이래 자연의 아름다움은 東西古今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아무리 표현해도 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안티에이징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섭리에 맛서 보지만 잘못하면 위의 우화처럼 추해 보이는 결과를 얻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섭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워 집니다. 내 얼굴에 숨어들듯 찾아오는 잔주름도 어쩌면 자연이 내 얼굴에 그려준 그림일지 모릅니다. 가을이 되어 이제 떨어질 채비를 하면서 아름답게 물 드는 단풍을 보며 우리가 마중 가듯 내 모습에 다가온 자연적 변화를 아름답게 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2007. 2. 2
88. 그리움. 기다림. 외로움의 三重奏
그리움, 기다림, 외로움과 같은 말은 청춘남녀들만의 專用語는 아닙니다. 감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비록 크기와 깊이와 넓이가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존재한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꼭 고 뿔같이 알싸한 아픔이지만 이외로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가슴 어딘가에 심겨있는 그리움, 기다림, 외로움의 자취를 더듬어 보세요. 불현듯 잊었던 당신의 젊음이 온 몸의 세포마다 살아옴을 느낄 것입니다. 각각의 의미는 다르지만 이들은 어딘가 공통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무치게, 애타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등과 같은 꾸미는 말을 앞뒤로 동반합니다. 누구나 이런 감정들을 경험했을 때는 그 순간만은 마음 속 깊이 나 끝까지 미치어 통할만큼 감정의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굳이 이 세 말을 三重奏라는 말로 묶은 것은 각각 다른 말들이 서로 통하여 너무도 잘 어울리는 감정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흔히 三重奏(트리오trio)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악기에 의한 합주를 말합니다. 주로 피아노■바이올린■첼로에 의한 피아노 삼중주 따위가 있는데 서로 다른 악기들이 연주되지만 그 각각의 선율들이 이루는 화음은 과히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 합니다. 그리움, 기다림, 외로움은 생각하는 순간부터 모두 자기 삶이라는 한 시간과 공간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는 자기만의 향기를 경험하기도하고 아울러 순간 순간 피어나는 아름다운 무지개와 환상으로 꿈과 바램의 동화를 만들어 갑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새 내 안의 허접스러운 욕망의 찌꺼기들이 걸러지고 순화되어 스스로를 정결하게 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러한 감정들이 넉넉하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순수해 질까요? 오늘도 이 세 가지 이름을 펼쳐 놓고 내 안에 일어나는 3중주를 들어 봅니다. 그러노라면 어느 새 나는 과거의 터널을 빠져나와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다시 만납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내 삶이 다시 활기를 찾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산골 작은 옹달샘처럼 이 시린 맑은 물들이 넘치게 솟아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7. 2. 5
89. 함께 있어 더 아름답고 돋보인다면
예천군 감천면에 가면 석송령(石松靈이)란 소나무가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나이가 약 600여 년으로 추정됩니다. 아주 오래 전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란 분이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 이름짓고, 자기소유의 토지 6,600여 평을 상속 등기해 주어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가 되었습니다.
한편 경북 상주시 화서면의 반송(盤松) 또한 나이는 500년 정도로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어 천연기념물 제293호로 지정■보호하고 있습니다. 밑동부터 크게 둘로 갈라져 있어서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서 한 그루 같기도 하고, 두 그루처럼 보이기도 하며 나무의 모양이 탑같이 보인다고 해서 탑송(塔松)이라고도 합니다.
이 두 소나무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門外漢인 내 눈에도 법주사 정2품 소나무처럼 과히 품위가 있어 보였는데 많은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나무를 보면서 두 나무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첨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소나무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나무 주변에 같은 종류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나무가 한 그루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란 그 한 그루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여러 나무와 얼마나 잘 조화되는 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나 명예, 권력, 돈에 대한 욕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한다면 분명 과욕이 되겠지요. 내가 가진 것들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골고루 나누거나 아니면 함께 어깨를 겨누며 더불어 살 때 오히려 더 돋보일 터이니 말입니다. 흔히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내 곁에 다른 이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거나 내 명성과 지위를 위해 내가 키워야 할 인재를 외면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다른 이에 비해 돋보일는지 모르지만 마치 울타리 없는 집과 같아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될 수밖에 없는 우를 범할 런 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지나 젊음의 활력이 둔해질 때가 되면 분명히 외롭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더불어 살도록 구조되어 있습니다. 후학을 기르고 인재를 키우는 일이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만드는 일이지만 결국 그를 통해 내가 훌륭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평범한 진리입니다.
2007. 2. 7
90. 노후라는 필연적 만남을 위해
어느 잔치 집 엘 갔습니다. 점심을 먹는 옆자리에 6-70대 노인 여섯 분이 나누는 대화가 이랬습니다.
“정림이 엄마가 큰일이야. 자식이 여섯이나 되는데 아무도 엄마를 모시지를 않으려나 봐”
“청춘에 혼자되어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모두 내노라하며 사는 놈들이 엄마를 모시지 않으려 하다니. 벌받지 벌받아”
“그러기에 뭐라고 했어. 시골집과 땅 팔지 말고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이젠 개밥에 도토리 신세니...쯧쯧”
또 어떤 자리에서 들은 젊은이들의 말입니다.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면 제품에 대한 일체 관리를 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만약 제품이 잘못되면 리콜까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요. 제품에게 공장을 책임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자식은 곧 제품이니 공장인 부모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강연을 하는 분의 말씀입니다.
“과거엔 노후 준비라는 게 필요 없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는 일이 곧 자신의 노후였으니까요. 그러나 이젠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사회가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자식은 부모 모시는 일을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 생각하고 이제 자식을 키우는 부모조차 자녀에게 노후를 의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나이의 세대를 통칭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요,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합니다.
산업화도 좋고, 정보화도 좋고, 앞으로 전개될 꿈같은 Ubiquitous(어디에나, 언제나, 무엇이나 가능한)시대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가 다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부모 자식간의 혈연의 관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가장 기본적 가치마저 뒤바뀐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되묻고 싶습니다. 한 번 쏟아 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가치관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미래 사회의 가정이 답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노인만의 일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에 노인이 되는 젊은이들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7. 2. 9
'나의 문학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에 피는 코스모스 (0) | 2008.07.10 |
---|---|
학창시절 (0) | 2008.04.30 |
경제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 (0) | 2008.04.30 |
안주유감 (0) | 2008.02.20 |
시험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0) | 200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