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겨울이 오기 전에
새벽에 다니던 산책을 오늘은 낮에 다녀왔습니다. 어둠을 헤치는 기분도 좋지만 마치 등산하는 기분으로 나서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산 꼭대기에 올라보니 가을은 나보다 한 발 앞서 정상을 넘어 저만치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푸른 기운으로 충만하던 숲은 긴장의 끈을 늦추고 오곡이 넉넉한 들은 이곳저곳 가슴을 조금씩 비우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도 순해지고 대신 숲에 사는 바람은 더 칼칼해져서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나무며 풀잎들에게 오소소 소름이 돋고 있습니다.
산책길 여기저기에 떡갈나무며 참나무들이 정성껏 가꾼 열매들을 조심조심 내려놓고 있습니다. 뽀스락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다람쥐며 청설모들이 객쩍은 침입자의 눈치를 보면서 부지런히 도토리를 줍고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이렇게 산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들은 다시 흙의 가슴에 안기고 있습니다.
나도 몇 개의 도토리를 주울 양으로 길섶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빨갛게 익은 망개 열매와 찔레,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도 저마다 열매나 씨앗들을 하나씩 땅으로 내려놓고 있습니다. 내려놓은 빈손, 그 손의 크기만큼 참 허전해 보였지만 그 빈자리를 햇살이 따스하게 다독거리고 있습니다.
문득 저들의 몸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자연은 거둔 것 모두 몸에 지니고서는 긴 겨울을 홀가분하게 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떡갈나무 사이로/칼칼해진 바람이/귓속말을 하고 있다.//
“손을 펴.”/가지들이/하나, 둘..../살찌운 도토리들을 내려놓고 있다.//
빈손이 될수록/가벼워지는 몸//
땅이/열매 보다 더 무거운/나무의 마음까지도/안아 주고 있다.
‘가을 날’이란 제목으로 이날 쓴 시입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서랍속의 허접스런 문서 같은 것들. 이를테면 떨어내려고 해도 진드기처럼 붙어있는 허욕에 대한 집착, 내 심령을 녹슬게 하는 미움의 조각들, 그리고 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게으름의 족쇄들 등등....
돌아보니 버릴 것이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많이 버릴수록 더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것 같다는 욕심이 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지요? 손을 털듯 훌훌 마음을 털며 산을 내려옵니다. 허허허
2009.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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