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232. 받침 돌

빛마당 2009. 11. 7. 21:34

232. 받침 돌

 초등학교 운동회 때입니다. 고학년이 되면 빼 놓은 수 없는 종목이 기마전입니다. 기마전의 방법으로 상대편의 말(馬)을 무너뜨리기, 또는 대장이 가진 깃발을 빼앗기, 그리고 모자 빼앗기 등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던지 기마전에서 백미(白眉)는 기수가 되어 상대를 제압하고 기를 빼앗아 운동장 가득한 관중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일입니다. 그게 얼마나 부러웠으면 자기 자녀가 기수가 되게 해 달라고 치맛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무리 기수가 능력이 있어도 기수를 기수되게 하는 말이 든든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말이 부실하면 기수는 싸움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창피를 당하니까요. 뿐만 아니라 말이 넘어질 때 가장 크게 다칠 수 있는 쪽은 기수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적성과 재능이 있습니다. 기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말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우리들에게 준 각자의 분복(分福)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를 무시하고 남의 위에 올라서는 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이나 역할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 더 중하고 어느 것이 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감당해야 할 그 자리, 그 일이 가장 중요함에도 말입니다.


 한 번쯤 올라앉고 싶겠지/가장 높은 곳에 홀로/자리 박차고 일어서고 싶겠지/짓눌리는    아픔을 털고//꿈이야 매일 꾸지만/깨고 나면 늘 그 자리//

 네 하나 훌훌 털고 일어나 보렴/모든 게 무너진단다.//그래서 너를 믿는다./

 저 성벽의 모든 돌들이/작아도 너는 귀해/네 위에 세워진 집만큼.


“받침돌”이라는 제 시입니다.

 문경새재에 가면 세 개의 관문(주흘관, 조령관, 조곡관)이 있습니다. 이 관문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성문이지만 또한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르던 희망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 길을 지나야 과거에 급제라는 관문도 뚫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곳이 관광지가 되면서 관문은 선비들의 꿈의 길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볼거리로 변했습니다.

 이 성 앞에서 오랜 세월의 이끼가 낀 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듬직한 성채의 아랫돌을 허리를 굽혀 만져봅니다. 그랬습니다. 이 돌은 성을 쌓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맨 처음 놓은 돌입니다. 이 돌을 여기 맨 아래 놓기 위해 얼마나 고르고 견주어 보았을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잘 견디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가슴에 담아오면서 오랜 세월 견디며 제 자리 지킨 받침돌들을 향해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2009.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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