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조사 모음

빛마당 2010. 7. 4. 18:08

 

* 1991년  4월 27일 큰 고모님 장례식과 2010년 4월 28일 외사촌 형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앙의 맨토였던 존경

  하던 두분 .

그 분을 위해 쓴 조사를 여기 올려 고모님과 형님의 모습을 더 오래 기억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각 교회나 기타 기관에서 조사를 쓰실 경우 참고로 하시면 도움이 될 것같아 여기에 올립니다.

 

 

고모님 조사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들 에게니라.”

 75년, 인생 고난의 긴 여정을 지나 오시면서 믿음의주요 의인 예수만을 푯대삼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승리로 싸워 이기시고 예비 된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러 떠나시는 고모님의 영전에 서서 불초 제가 조사를 지어 하늘 길 환송사로 바칩니다.

 고모님, 정녕 떠나십니까?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시던 우리 교회, 새롭게 신축된 교회의 앞자리에 안으셔서 기도 하시는 게 소원 이라 시던 고모님이 어떻게 잘 단장된 교회가 여기 이렇게 우뚝 서 있는데 정녕 떠나시렵니까?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이 고모님 가시는 길 기쁨의 찬송을 불러야 하는데 오늘따라 이 자리가 더욱 쓸쓸하고 가심 허전하여 옴은 웬 일입니까?

 당신께서 자리하셨던 보이지 않던 그 자리가, 당신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손길이 너무도 넓고 따뜻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고모님

 돌이켜 보면 지난 75년은 세상의 물결만큼이나 어렵고 험한 길이었지만 당신은 당당히 살아오셨습니다.

 선산군 옥성면 태봉동, 하늘이 가장 가까운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 김해김씨 김상걸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금이 사이에 늦동이 장녀로 태어나셔서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라셨지요. 13살 나시던 해 이곳 상주로 이사를 오셔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으로 말씀에 굳게 서셨고 18 살 꽃 다운 나이에 상주읍 부원리 이명원의 2남 이정근과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어 새 삶을 위한 터전을 이곳에 가꾸시기에 여염이 없어셨습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했지만 남다른 부지런과 인내로 모진 가난과 싸우시면서 인생의 장막 집을 짓기 위해 얼마나 애써셨습니까?

 배고픔의 서러움을 때로는 시래기 밥으로 참기도 하셨고, 가난의 서러움을 앞날의 꿈으로 채우시면서 4남매 알뜰이호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비참해 지지 않으셨고 그 어떤 현실의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함을 보여주신 여장부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신생의 장막 집을 굳게 세우시고 하늘나라 영관의 집도 아름답게 세우신 승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고모님

 당신은 신앙의 측면으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셨습니다.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웠던 그 시대, 모태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 받아 75년을 하루같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예수를 목표로 신앙을 견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봉교회 초대교인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교회를 네 번씩이나 건축하면서 즐거이 봉사하셨고 40년간 집사의 직분을 맡아 봉사해 오시다가 지난 85년에는 권사로 취임하시어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다하시기에 신명을 다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9남매 중 5남매를 먼저 보내는 하늘 무너지는 그 큰 아픔도, 세상살이 힘들고 고달플 때도 고모님은 기도로 새 힘을 얻어 일어 서셨지요. 새벽마다 교회의 앞자리 무릎 꿇고 앉아 가정 구원과 교회 발전을 위해 눈물 뿌려 드린 기도가 그 얼마이셨습니까? 평생을 한결 같이 드린 간구의 기도가 열매를 맺어 주님 앞에 앞서가신 고모부님 구원받게 하셨고, 자녀들 또한 저마다 신앙의 자리에서 바르게 서서 제 몫을 다하고 있으니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지난 3월이었지요. 주일 저녁 예배시간 전에 들렸던 저를 보시곤 오늘 저녁은 내 기도 순서인데 마지막 책임을 다해야 하신다며 성경찬송 챙겨두시고 기다리고 계셨지요. 교회까지 업어만 달라고 떼를 쓰시던 당신을 억지로 만류하고 돌아 나오면서 저는 그만 안타까움에 울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초대교회 여성도 다비다 처럼 헌신과 봉사의 본이 되셨습니다.

교회 일이나 마을 일이나 궂은 일 힘든 일 있는 곳마다 당신은 당신의 일처럼 늘 그곳에 계셨습니다. 바람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남쪽 길, 북쪽 길 오르내리면서 잔치집 과방에서부터 상가집 과방에까지 당신이 필요한 자리엔 늘 계셨습니다. 이 마을 임산부 산파역은 얼마나 하셨으며 허기기지고 배고픈 사정은 없는 사람이 알 듯 어려운 살림 쪼개가며 남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누구보다 좋아하셨지요. 신봉교회 초창기 교역자의 사택조차 없던 시절, 자신의 건너 방이며 아랫방, 심지어 큰방까지 내어 주시며 주의 종을 섬기고 공경하셨습니다. 해마다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 고되다 아니하시고 아들 며느리 만류에도 늘 앞장서서 자원하셨지요. 큰 일 집 잔심부름 조목조목 잘도 아셨고 교회의 큰 그릇 작은 그릇 빠짐없이 챙기시며 먼지 하나라도 손수 깨끗이 닦으시던 분. 교회 건축, 사택건축으로 손수 챙기지 못한 교회 그릇들을 몸져누우셔도 헤아리시며 걱정하시던 그 손길을 이제 어디서 다시 본단 말입니까?

 당신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들어서 가슴 아픈 자신의 이야기는 꼭꼭 묶어 가슴에 묻어 두시고 다른 사람 아픈 가슴 쓰다듬어 위로하기에 바쁘셨지요. 고모님 수척한 모습 너무도 안스러워 지나간 이야기들 가슴에 새겨 두고 싶어서 지나 온 한 세상 이야기 들려 달라 하실 때 내 자랑 들어내면 하나님 영광 가리울까 두렵다면서 그만 입 다무시더군요. 살아생전 들려주시던 그 많은 이야기 가슴 속에 새겨 두지 못했음이 이제는 한이 됩니다.

 고모님

 당신은 저에게 고모님이자 아버지셨고 홀로되신 어머니에겐 든등한 남편이셨습니다. 아버지 없는 어린 조카가 얼마나 안스러웠으면 친 자식보다 어쩌면 저를 더 사랑하셨습니까? 당신의 사랑의 젖을 먹고 이렇게 자란 제가 이제야 그 사랑 갚는가 싶은데 이렇듯 호련이 떠나시옵니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철이 없어 몰랐지만 오늘 이 아침 하늘이 무너집니다.. 고모님 주신 사랑 어디에다 갚으란 말입니까?

 그러나 고모님 이제 편안히 가십시오. 그토록 아끼셨던 당신의 교회가 아름답게 서지 않았습니까? 4남매 가정을 이루어 믿음으로 굳게 섰습니다. 학준이 이제 성혼이 가깝고 학철이도 믿음직하지요. 참으로 할머니께 극진했던 연희가 든든하게 자랐으니 더욱 형제 우애하며 교회를 섬기며 믿음 안에 살겠습니다.

 이 세상 수고와 염려 모두 놓으시고 예수님 손잡고 가시는 영광의 길만 가십시오. 앞서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고모부님이 반가운 모습으로 영접하시는 영원한 그 나라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한 그 나라”에서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고모님의 모습, 승리의 삶을 살아오신 모습, 남아 있는 저희들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1991년 4월 27일


사랑의 젓으로 키우시던 조카가 삼가 올립니다

 

 

1989년에 찍은 사진

좌로부터 김성렬 큰고모님 김성님 둘째 고모님. 김안성 숙부님 

 큰고모님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조사


 형님! 성백일 형님!

 형님의 영전에 서서 이 못난 동생이 마지막이 될 형님의 이름을 이렇게 큰 소리로 불러 봅니다.

요 며칠 형님 이렇게 훌훌 떠나시는 게 안타까운지 봄 날씨 답지 않게 하늘도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형님의 이름을 불러보는 내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한지요. 하늘나라에 형님이 꼭 필요하셔서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는데 왜 이렇게 발목을 잡고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지요.

여기 형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형수님과 아들 신제, 경제, 그리고 딸 신영이 그리고 손자 손녀들, 떨어져 있어도 한시도 잊은 적 없는 형제자매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모였는데, 평생을 눈물 뿌려 기도하며 섬기던 부원교회 앞마당, 여기 성도들과 갈랩중창단, 그리고 정성으로 가르치던 제자들과 25년을 평신도 운동을 함께한 실로암 18명의 형제들이 여기 섰는데,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부원동네 이웃들이 이렇게 함께 모였는데 어찌 형님의 그 인자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장 사진으로 만 우리 앞에 계신단 말입니까?

 형님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환송의 조사를 하기위해 참으로 못난 동생이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데 정작 형님이 베풀어 주신 많은 사랑을 아직 하나도 갚지 못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막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합니까. 만남과 헤어짐은 하늘의 뜻이요. 우리는 하늘의 뜻을 겸손이 받들어 살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에, 형님이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의 자취를 기억하며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 영광된 천국의 입성을 눈물로 기꺼이 환송하고자 합니다.

 

 형님! 

 형님은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이자 형제들에게는 늘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닥친 참으로 힘들었던 지난 시간, 그러나 형님의 얼굴에서는 근심이나 걱정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도록 늘 그렇게 의연하셨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다 겪었던 지난날 어려운 살림살이, 넉넉지 못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형님은 6남매의 장남이 떠맡아야 할 일들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왜 보다 편하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형님은 내 가정 내 한 몸 보다는 늘 형제들의 평안과 행복을 먼저 챙기셨지요. 그 조그마한 몸에서 어찌 그런 넓은 마음을 품고 계셨는지요? 아픔도, 힘듬도, 고난도 형제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형님은 그 마음 안에 다 품어두시고 기쁨으로 사셨음을 저는 압니다.  


 형님! 형님은 부원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상주지역 교계에서도 훌륭한 영적 지도자셨습니다.

조상들의 신앙을 이어 받아 오로지 평생을 부원교회를 떠나신 일 없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음을 압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 지휘자로, 집사로 장로로 끝없이 이어오는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어찌 넘기 힘든 고비들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형님은 늘 온유와 겸손으로 목회자를 섬기며 몸에 배인 헌신을 통해 한 점 부끄러운 일 없이 최선을 다하셨으니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린’ 사도바울처럼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 남들이 결심하기 힘든 장로 조기 은퇴를 과감하게 하신 일이나 은퇴 후에도 실로암과 같은 평신도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음은 물론, 상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친 ‘갈랩 중창단’의 창단과 여기 쏟으신 그 정성을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형님은 이 땅에 진정한 스승이셨습니다.

 1968년 초등학교 근무를 시작으로 남산중학교에 부임한 1970년 3월10일부터 1997년 2월 18일 명예퇴임을 하실 때까지 3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친 올곧은 스승이셨습니다. 열악한 학교 여건에서도 흔들림이 없었고, 부족한 경제생활에서도 꿋꿋하셨습니다. 정서가 메마른 아이들에게 음악으로 풍성하게 하셨고, 국어 시간의 그 열정으로 학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때로는 온유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힘들고 어려운 학생들 편에 서서 그들을 한사람의 지식인으로 기르기보다 올바른 인격자로 기르기에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이제 그 열매들이 익어 오늘 많은 제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스승을 잃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늘 함께 하는 이들이 있음은 이를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교사는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영적 멘토였습니다.

 1971년 3월 11일 제가 남산중학교에 첫 부임을 했을 때부터 퇴임하시기까지 30여년을 제게는 교육계의 선배로서 늘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셨음을 기억합니다. 내가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흔들릴 때나 철없는 실수를 저질 때마다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때로는 질책으로 때로는 격려로 저를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여 자신으로 인해 동생의 승진이나 교육활동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정년을 많이 남기신 나이에 저를 위해 명퇴를 하셨음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시던지 늘 부족한 제 이름을 자랑스럽게 불러 주심도 저는 기억합니다.

 1993년, 제가 신봉교회 장로로 안수를 받을 때와 2005년도 교감으로 승진하였을 때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하셨던 형님!

‘장로는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목회자를 도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라며 내 손을 꼭 붙잡고 간곡하게 부탁하신 형님의 권면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그 부탁의 말씀을 아직도 다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직도 형님의 꾸지람과 격려가 더 필요한데, 형님처럼 되려면 아직 내 모습은 멀었는데 이제는 누구에게 묻고 꾸중을 들어야 합니까?


 형님은 마을에서도 훌륭한 인격을 갖추신 지도자 이셨습니다.

 퇴임 후 제2의 인생을 경영하시면서 그 인생을 참으로 훌륭하게 이루신 분입니다. 논과 밭을 늘 정갈하게 일구셨고,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늘 부지런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는 일, 나무를 가꾸는 일 하나에 이르기까지 배움에 목말라 끝없이 공부를 하셨고, 자신이 배운 지식과 경험을 결코 혼자 가지지 않으시고 이웃과 나누며 함께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에 앞장서 오셨습니다. 마을에 어려움이 생기면 내 일처럼 밤잠을 설치면서도 동민들과 함께 하셨고 신앙을 가진 이나 가지지 않은 이들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신 것, 여기 형님 앞에 서 계신 모든 마을 분들의 증언입니다.

얼마 전 노인회 총무를 맡으셨다며 노인들을 위해 좋은 글귀 하나를 써 달라고 부탁하셨지요.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 글 귀 하나 제 때에 써 드리지 못하고 대신 광고사에 부탁하여 제작하여 드렸더니 보기도 좋고 너무 멋지다고 좋아하셨잖아요. 아마도 ‘노인회관’에 걸려 있을 그 글귀는 “노인건강10계명”일터인데 이 글을 형님이 직접 걸어 두시고 형님이 먼저 가신단 말입니까?


 형님! 

 형님께서 사셨던 이 땅 74년, 참으로 되돌아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인생 나그네 길, 그 길에서 이루어 놓은 수많은 자취들을 어리석은 저의 기억과 무딘 필재로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형님의 참 신앙인의 삶과 참 생활인의 삶을 오래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삶의 표본으로 삼겠습니다.

이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천사들이 형님을 마중하러 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눈물을 삼키면서 형님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형님! 그립던 부모님, 그리고 먼저 간 누이동생, 앞서가신 신앙의 조상들 만나시겠지요. 형님이 그토록 사랑해 주셨던 당신의 고모인 우리 엄마도 형님을 맞이하러 나오셨겠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또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으로 여기 남은 이들, 서로 위로를 삼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걱정과 염려, 슬픔과 눈물, 이제 다 내려놓고 형님! 성백일   

 안녕히 가십시오.


2010년 4월 28일


형님이 주신 사랑의 빚을 다 갚지 못한 동생이 삼가 올립니다.

 

2000년 실로암 필리핀 의료선교때 형님 모습 좌에서 둘째




'나의 문학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5. 기왕에 말하려면   (0) 2010.07.14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0) 2010.07.05
244. 상주(尙州) 향청(鄕廳), 다시 태어나다   (0) 2010.07.03
나무곁에서  (0) 2010.04.15
봄날  (0) 201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