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고등어와 꽃바구니
결혼해서 살다 보면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나 어른들의 생신과 기념일도 있고 요즘은 자녀나 손자 손녀의 생일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일은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지요.
남정네들은 자칫 이런 기념일을 잘 잊고 삽니다.
집안의 크고작은 일이야 아내가 챙기는 편이어서 마음을 놓는데 아내와 관계된 일은 특히 잘 잊어버립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출근하는 내게 어머니께서 몰래 일러 주셨습니다.
“오늘 어미 생일인 거 기억하고 일찍 들어와야 해.”
며느리 생일까지 다 챙겨 주시는 어머니가 고맙기도 해서 기분이 좋게 출근은 했는데
버릇처럼 퇴근하면서 이곳저곳의 문학인들과 한바탕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 때문에 아내의 생일은 까마득 잊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다니던 시절, 섣달 초사흘 찬바람을 가르며 집으로 오다가 생각하니 ‘아차’ 아침에 귀 뜸을 해주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급히 자전거를 돌려 시장을 들렸지만 이미 대부분 가게는 닫혀 있었지요.
할 수 없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막 문을 닫으려는 어물전이 보였습니다.
다행이다 싶어 사온 것이 간고등어 한 손이었습니다.
생일선물로 간고등어가 어울릴 형편이 아님을 그땐 왜 몰랐는지.
아내는 서운한 일만 있으면 두고두고 간고등어로 나를 짭짤하게 궁지로 몰아넣곤 했습니다.
이듬해입니다.
이번에는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다가 출근하는 날은 아예 손바닥에 볼펜으로 써서 나갔습니다.
퇴근하는 길에 꽃가게에 들려 모처럼 진열장 안에 다소곳이 앉은 꽃바구니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축하의 글과 글씨를 써서 배달을 부탁했습니다.
오늘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물론 자녀까지 다가올 공습경보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현관문에서 ‘딩동’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현관문을 연 아내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꽃바구니 배달에 놀라 한참을 서 있습니다.
그리고 첫마디. ‘돈도 없는데 웬 비싼 꽃은?’이었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꽃처럼 밝아졌습니다. 아내는 저녁상 차리는 것도 잊은 채 이곳저곳에 전화합니다.
“네 형부가 마음이 변했는지 꽃바구니를 다 사왔네.”
가까이 사는 처제에게 은근히 전화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꽃바구니는 거의 다 시들 때까지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야 알았습니다.
여성들은 맛있는 고등어 보다는 바라보는 꽃바구니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허허.
2012.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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