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276. 책임(責任)

빛마당 2012. 6. 29. 13:42

276. 책임(責任)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신발을 새로 사 오시면 꼭 고무신 코에 빨간 색실로 수를 한 뜸 놓아 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초등학교를 거의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고 심지어 중학생이 되어 운동화에까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시를 해 주셨습니다.

새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지만 난 빨갛게 수가 놓인 그 신발이 정말 싫었습니다.

우리 모두 경험이지만 그 시절엔 신발도 많이 잃어버렸지요.

학교에서 신발을 잃고 맨발로 터벅터벅 신작로를 걸어오는 날은 발바닥이 아픈 것 보다 어른들에게 들어야 할 꾸중이 무서워 가슴은 더 무거웠습니다.

이런 아픈 경험들을 가끔 생각나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식당입니다.

대부분의 식당을 들어가다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신발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솔직하게 그 식당을 나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긴 장례예식장에 갈 때는 ‘헌 구두를 신고 가라’는 우스갯말도 있으니 ‘아직도 우리 사회가 신발을 훔쳐가는 사회인가’ 하고 쓴 웃음을 웃곤 합니다.

‘책임(責任)’이란 ‘맡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라고 사전적 의미는 말합니다.

흔히 ‘고객은 왕’, ‘고객은 황제’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찾아오는 고객의 신발은 식당이 당연히 책임져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왕 같은 고객’을 향해 면전에서부터 ‘당신의 신발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객을 우습게 보는 처사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회사의 경영방침은 ‘고객중심’입니다.

다시 말해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이 고객중심이 관공서의 민원실에도 적용되어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신발을 책임지지 않는 다는 것은 고객중심이 아니라 결국은 ‘주인중심’의 영업일뿐입니다.

물론 식당에도 할 말은 있습니다.

분실한 신발의 종류, 브랜드, 가격 등 주인으로서는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고객의 말만 듣고 보상해 주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가게는 분실한 신발을 보상했더니 이를 악용하는 고객도 있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객의 신발을 보상해 주었을 때 고객이 가지는 신뢰의 가치와 또한 보상으로 인한 금전적 손해 중 과연 어느 것이 유익한 것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저녁 시간에 식당엘 들렸습니다.

들어가는 정면 신발장 위에 어김없이

‘신발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귀중한 신발은 주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잘 보관하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표어가 신발장 위에 붙어있는 가게를 상상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허허 글쎄요.

201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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