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280. 추억이란 이름의 이상한 조각 하나

빛마당 2012. 11. 15. 21:56

280. 추억이란 이름의 이상한 조각 하나

버스 한 대가 신호를 받고 서 있습니다. 내 차도 그 뒤에서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어 ‘진안여객’이네!”

아내의 말입니다. 벌써 백 번도 더 들은 말입니다. 그 순간 아내는 또 40여년의 세월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진안여객’

1973년에 결혼을 했으니까 올 해로 39년이 되는 셈입니다. 홀시어머니 모시고 신혼을 시작했지만 ‘문학을 합네.’, ‘그림을 그리네.’라고 바깥으로만 쏘다니는 신랑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습니다.

첫돌 지나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온 사촌 여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거기에 또 고등학교 입학한 외사촌 남동생까지 어머니가 대려와 우리 집에서 생활을 했으니 아침마다 세 개의 도시락을 싸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가 어떤 시집살이를 하고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 땐 몰랐습니다. 이런 아내에게 1년에 두 번 자유로운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엘 가는 날입니다. 안동에 있는 친정으로 가는 유일한 직행버스가 바로 ‘진안여객’이었습니다.

친정엘 가 봐야 별 신통한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내로서는 ‘시집살이’란 어둡고 답답한 터널에서 자유로운 길로 나오는 유일한 해방구였습니다.

신랑이란 사람은 책 한 권 손에 달랑 거머쥐고 시(詩) 한 줄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차멀미로 보채는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몇 개의 보따리를 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아내를 괴롭혔지만 아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비포장 도로 두 시간을 가는 내내 흙먼지 이는 차창에 비친 아내의 얼굴은 시외버스 주차장에 들어 설 때까지 환한 복사꽃이 피었습니다.

그 추억의 친정길이 40년의 세월 속에 빛이 많이 바래졌습니다.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돌아가시고 그 때 그 정겹던 가족들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좁아도 아랫목 하나는 참 따뜻했던 옛집은 이제는 다른 사람의 문패를 달고 퇴락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월의 흔적 속에 모습조차 변하고, 그리운 사람들마저 떠나고 있지만 아내의 가슴속엔 아직도 변하지 않은 추억 하나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 고맙습니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 이상한 추억 하나가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마다 힘이 되어 주는 가 봅니다.

‘진안여객’

숱한 여객회사들의 부침이 있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내의 가슴에 행복한 추억을 되살려 주는 참 고마운 버스 회사 이름입니다.

또 언제 우연히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저 버스의 이름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되기를 빌어 봅니다.

20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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