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계처사(黃溪處士) 김담수(金聃壽)와
아들 정룡(廷龍) 정견(廷堅)
조 희 열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竹岩里)는 ‘대바우’라고 불려왔는데 소비와 구상, 구중의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라 했고, 그 중 죽암 1리는 대바우와 반내, 지금은 중리라고 부르는 구중리를 병합하여 불리는 곳이다. 그래서 대바우를 죽중리(竹中里), 원죽암(元竹岩)이라고도 하는데,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을 특히 ‘섬마’라고 한다.
이곳은 상주에서도 낙동강을 건너 동쪽에 있어서 지금의 잠수교(潛水橋)인 강창교(江倉橋)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대바우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낙동의 분황과 왕래하던 길목인데다가 김해 지방에서 소금배가 올라오던 시절에는 한 때 부근의 주민이 많이 이용하여 매우 번창했던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 1600년경부터 풍산 류씨(柳氏)와 의성 김씨(金氏)가 정착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 되어 인심이 순후하다.
이곳에 삶의 터를 잡은 김담수(金聃壽)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字)는 태수(台叟)이며, 호는 서계(西溪)이다. 신라의 왕자 석(錫)이 의성(義城)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 분을 시조(始祖)로 하고, 의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 지금의 본관이다.
효행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사양한 장사랑(將仕郞)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평양부원군 천상(天祥)의 후손인 순천 박씨(朴氏) 처사 탄(坦)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1535(중종 30)년 10월 10일 성주(星州) 윤동(倫洞)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8세 때 아버지가 작고하였는데 상례(喪禮)를 어른처럼 행하였다.”
13세 때 학문을 시작했는데 어릴 때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어 허리를 굽혀 겸양하면서 남보다 자신을 낮출 것을 생각하였다. 어려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는데 얼마 안 되어 남명 선생이 작고하자 좀 더 일찍 남명의 제자가 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목사로 부임해 왔을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공부하는 것이 남다른데다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감탄하였다.
30세가 되던 1564(명종 19)년에 어머니의 권고로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께 간청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아예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경전(經典)공부에 온 정성을 기울이며, 조금의 게으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다닐 때는 비록 개미집이라도 보면 반드시 개미가 다칠세라 피하여 다녔고, 변소 갈 일이 생겨도 어린 남자 종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족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형제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는 도의(道義)로 사귀었고, 벗을 사귀는데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기면서 행실이 겸손하므로 온 고을 선비들이 공(公)과 친구 되기를 원했다.
진사(進士) 박운기(朴雲驥)와는 한 마을에 살면서 매일 향교에서 만나지만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반드시 당(堂) 아래로 내려와 읍(揖)을 하여 서로를 존중했을 뿐 아니라 길을 가다가 충효각(忠孝閣)이나 송덕비(頌德碑)를 보면 경의를 표하여「사람의 도리를 다한 충신 효자와, 백성에게 혜택을 준 정사(政事)는 오만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그러했다.
집안의 법규를 엄중히 하여 친척 간에 친애하면서 불의를 저지르지 말 것을 강조하여 우애가 돈독했다. 어느 때 가까운 친척이 공(公)의 선대(先代) 묘소(墓所)를 넘보고 관청에 무고(誣告)를 하여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법사(法司)에 나가 서로 화해를 하고 그 일이 마무리된 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혹 자질(子姪)들이 속상해 하면「친척 사이에 내가 그들을 사랑할 뿐인데 어찌 원한을 가질 수 있느냐?」라며 주의를 주었다.
빙장(聘丈)이신 증 좌승지(贈左承旨) 창녕(昌寧)인 조몽길(曺夢吉)이 자녀들이 아직 어린 가운데 합천(陜川)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사위인 공(公)에게 뒷일을 부탁하자 공은 상장례(喪葬禮)를 주관하고, 아이들도 모두 교육하여 혼사를 마친 후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159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繕工監)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오직 권력만을 탐하여 국민을 위한 일을 찾고 협력하기 보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아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적처럼 여겨 서로 공격하는 일을 정치로 알고 파당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공(公)은
‘요즘 들은 말에 의하면 조정에 당파가 생겨 서로 공격을 일삼고 대사(大事)를 회복할 뜻을 갖지 않는다고 하므로 이를 개탄’하여 쓴다면서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다.
時事蒼黃日(시사창황일) 시사가 급한 오늘
君臣協力秋(군신협력추) 군신이 협력할 때이건만
如何傾軋急(여하경알급) 어찌하여 알력만 일삼아
獨使至尊憂(독사지존우) 임금 홀로 근심하게 할까
1592(壬辰)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산으로 피란하였다. 합천의 황계폭포 아래에서 문학(文學)과 도학(道學)을 탐구하시다가 광해(光海)조 당시 성주로 돌아오셨는데 선조(宣祖)는 황계처사(黃溪處士)라고 호(號)를 내리시면서 황매(黃梅) 한 그루를 하사하셨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나라는 온통 분탕질 당하고 백성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건만 정치인들은 이런 와중에도 당쟁만 일삼고 있었는데, 선배 동고(東皐, 또는 月川)의 시운(詩韻)을 차운하여 그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亂離何幸遇先知(난리하행우선지)
난리 속에 다행히 선배를 만나
悟却遽非笑墨絲(오각거비소묵사)
거백옥처럼 잘못을 뉘우쳐 묵적의
염사(染紗)를 비웃네.
問柳尋花時政合(문유심화시정합)
오늘의 정치는 화류(花柳)나 찾는데 알맞아
銷憂何害倒深危(소우하해도심위)
걱정 달래려 잔 기우린 것이 어찌 해로우랴
난리가 끝난 후 사람들에게서 떳떳한 마음〔항심(恒心)〕이 없어지자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비록 선행(善行)은 못할 지라도 악행(惡行)으로 선조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 경계를 시켰고, 만년에는
「차라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의롭지 못한 일은 결코 하지 말라.」
고, 가르쳐 아들들은 정당한 재리(財利)가 있어도 남들과 이해를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목사 허간(許澗)이 묻기를,
「내가 이 고을의 원이 된지 수년이 되었지만 그대 집안사람은 한 사람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발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덕을 쌓았기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여 자신을 굽히기 때문입니다.」
라 했다.
1597(丁酉)년 다시 왜란이 일어나자 무술(1598)년, 아들 정룡(廷龍)이 예안 현감으로 있어서 공은 어머니를 그 관아로 모시어 봉양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고을로 가서 거처를 정했는데 그 까닭을「선성잡영서(宣城雜詠序)」에서,
‘1598(무술)년 모춘(暮春) 초에 내가 왜란을 당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선성으로 가서 우거 했다. 선성은 나의 큰 아들이 읍재(邑宰)로 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들이 령(令)으로 부임해 있는 곳을 아버지가 그 고을에 사는 것은 나라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화산부(花山府) 임하현(臨河縣)의 북촌(北村) 정정리(鼎井里)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은 근친(覲親)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안 현령인 아들 정룡의 편지에 답하기를,
‘… 지난 번 체찰사를 만나 네가 잘 있다는 것과 청량성(淸凉城)이 견실하여 피난을 할 만하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리고 가야성(伽倻城)은 상공(相公)에게 개축하도록 말하였고, 야계(倻溪) 3방(坊)과 야로(冶爐) 9방(坊)은 영해의 사우(士友)들과 초 6일부터 그 미완처를 더 보완하게 하였다. …… 다만 군기(軍器)와 군량이 부족하니 민망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천병(天兵)이 내려온다고 하니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그들도 유 총병(劉憁兵)처럼 주둔만 하고 있으면서 싸우지 않는다면 공연히 국고만 축내는 폐단이 있을 뿐이니 …… ’
라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다.
이 당시 이곳에 살면서 월천(月川) 조목(趙穆)⋅설월(雪月) 김부윤(金富倫)⋅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일휴당(日休堂) 응협(應夾)과 종유(從遊)하면서 시(詩)를 서로 주고받았다.
57세 때인 1591(선조 24)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늙어서 관가의 말직으로 부임하면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결국 나아가지 않았다.
1598(무술)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이 병을 앓고 있었는데도 지극한 효성을 지닌 공은 초·종상(初終喪) 때 너무 심하게 우시어 그만 기절했다가 깨어나 이를 본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는데도 끝내 정성을 다해 장례를 집행했다. 이때 왜적이 아직 해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상주 위수(渭水)의 남쪽인 옛 마을 뒤 진향원(震向原, 또는 兌向原)에 장사를 했다.
묘지(墓誌)를 통훈대부 행 고원 군수 조정융(曺挺融)이 찬(撰)했는데 이르기를
「…공이 상기(喪期)를 마친 후는 그 묘려(墓廬)에서 거처를 했는데 상주시 중동면 죽암(竹巖)이 그곳이다. 이곳 산수가 수려한 것을 좋아하여 그 곳에서 평생 살려고 송죽(松竹)과 매국(梅菊)을 심기도 했다. …」고 했다.
1602(임인)년 가을 성산(星山)에 있는 선산(先山)을 성묘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가천(伽川) 옛 집〔舊第〕에서 다음해 정월 26일 69세로 돌아가셨다. 4월 11일 반장(返葬)하여 사대(沙垈)의 어머니 묘소 우측에 장사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선생의 죽음을 만사(挽詞)에서 이렇게 애도하고 있다.
幸同生此國(행동생차국)
다행히 당신과 함께 이 나라에 태어나
同業許心知(동업허심지)
같은 학문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 주었고
道義推先重(도의추선중)
도의를 추대하여 중망이 있었지만
艱危人事違(간위인사위)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인사를 어겼구려.
鶴歸遲會合(학귀지회합)
선학이 떠나간 후 언제나 만날고
䞓幅遽翩飛(정폭거편비)
붉은 기폭 속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네.
一慟將何及(일통장하급)
통곡한들 어찌 따를수야 있을까만
難堪老淚垂(난감로루수)
늙은이 눈물을 거둘 수가 없구려
澁酸梨柿誰相好(삽산리시수상호)
떫은 감과 신 배를 누가 좋아 했던가
年少群居幸見知(년소군거행견지)
나이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가
白首分携仍永隔(백수분휴잉영격)
백발 되어 헤어졌다가 영원히 헤어지니
晨星此日不勝悲(신성차일부승비)
이날 새벽 별 되니 슬픔 견딜 수 없구나 /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은,
友于情義己毛皮(우우정의기모피)
우애하는 정의는 이미 모피 같아서
函丈摳衣更有依(함장구의갱유의)
스승을 찾아뵙고 다시 의지 하였네.
鳥別杭山靑草夢(조별항산청초몽)
새가 항산에서 이별함은 청초 꿈같은 데
鶴歸遼陽白頭悲(학귀요양백두비)
학이 요양으로 돌아가니 백발이 슬퍼하네.
秋江眉宇今何處(추강미우금하처)
추강의 그 얼굴 지금 어디 있을까?
故宅林泉獨舊時(고택임천독구시)
임천의 옛 집은 홀로 예와 같건만
明日洛東江上路(명일낙동강상로)
내일 낙동강 위의 길에서
白鷗應待主人歸(백구응대주인귀)
당연히 백구는 주인 돌아오길 기다리네.
라고, 했다.
1603(선조 36)년 정월 26일 세상을 떠난 후, 1765(乙酉, 영조41)년 성주의 사액서원인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입향하시고, 1796(병진, 정조 20)년 상주의 낙암서원(洛嵓書院)에서도 향사하고 있다. 성주(星州) 윤동에 서계정(西溪亭)이 있고, 경남 합천(陜川)의 황계폭포 곁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서있다.
서계(西溪) 선생의 맏 아들 김정룡(金廷龍, 1561∼1619)의 자는 시현(時見), 자호(自號)는 월담(月潭)이고, 다섯 째 아들 김정견(金廷堅 1576∼1645)의 자(字)는 훈경(勳卿)이고, 호(號)는 국원(菊園)인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증 좌승지(左承旨) 몽길(夢吉)의 따님이다.
장자(長子)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은 1561(명종 16)년 성주 윤동(倫洞)에서 출생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에게서 공부하셨다. 1585(을유, 선조 1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거쳐 예안 현감이 되었다. 예안 현감 재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軍糧米) 수송에 공이 커 선조 임금으로부터 황감(黃柑)을 상으로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과 병조좌랑을 지내고, 영월군수⋅풍기 군수를 거쳐 이조정랑을 지냈다. 집안의 효(孝)를 이어받아 일생 동안 소학(小學)을 실천하기에 노력했다.
1609(을유, 광해 1)년 졸하시고, 1796(병진, 정조 20)년 낙암서원에 종향했다.
서계(西溪) 선생의 다섯 째 아들 김정견(金廷堅 1576∼1645)의 자(字)는 훈경(勳卿)이고, 호(號)는 국원(菊園)이다. 1576년(병자, 선조 9)년 성주 윤동에서 나셨는데 특히 효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에게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배웠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도학을 연마했다. 1612(광해 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 낙암(洛嵓)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사림(士林)이 백세사표(百世師表)라 칭했다.
사시던 곳이 지금의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의 ‘반내’라는 곳인데 마을 앞에 갈대가 무성해서 갑장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장천(長川)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대안(對岸)에 위치하고 있지만 흐르는 내가 반만 보이기 때문에 불리는 땅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마을이 내〈川〉의 옆에 있어서 불린다고도 하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이곳에 작은 서재를 지어 그 곳에서 책을 읽으며 학덕(學德)을 쌓고 학문에 힘쓰면서 후학(後學)을 기르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깝게도 나이 약관(弱冠)에 돌아가셨는데 지으신 책도 집에 불이나면서 다 타버리고 전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보면 깨끗하고 올곧은 지조와 참으로 인간다운 행실을 칭송하면서 자신을 지키는 독실함과 남과 함께 하는 충실함, 도(道)를 보는 것이 밝음〈見道明〉을 애석히 여기고 있음을 보아 어진 선비다운 삶을 사신 분임을 알 수가 있다.
1645(을유, 인조 23)년 돌아가시니, 1796(병진)년 낙암서원에 종향(從享)했다.
낙암서원(洛嵓書院)은 지금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마을 입구에 있다.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선생과 그의 두 아들인 월담(月潭) 김정용(金廷龍)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을 배향한 곳이다. 1745(영조 21)년 설립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0(고종 7)년 훼철되어 단소(壇所)로 전해 오다가 1988년 복원했다. 낙동강이 멀리 바라다보이고, 야트막한 산이 둘러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류시완(柳時浣)이 쓴「낙암서원복원기」에 의하면, 이들 3부자는 ‘벼슬할 때는 선정이 빛나 청백리의 반열에 들고, 물러나서는 스승을 따라 강학수도(講學修道)와 덕을 쌓아 청렴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그 문장과 업은 연이어 빛나니 소씨(蘇氏) 부자(父子)처럼 주변에 알려지고 당시의 사람들이 풍도와 덕을 흠모하며 따랐다. 1796년 봄에 영남의 선비들이 성주(星州)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서 발의를 하여 도남서원에서 향내의 각 서원에 통문을 보내 세 분 선생의 시축(尸祝)하는 곳이 없을 수 없다 함을 알리고 재원 마련을 위한 일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이 해 겨울에 서원이 완성되었다. 그 곳 지명을 따라 낙암서원(洛嵓書院)으로 이름하였다.’라 했다.
1870년에 서원이 훼철되었고, 1987년 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상의하기를 서원의 흥폐는 사도(師道)의 존망과 관계가 있어 반드시 복원하여야 한다고 결정되어 전보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지금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건물은 법을 따르는 것이 ‘상(象)’이며, 백행의 근본인 충효인의예지신(忠孝仁義禮智信)과 경(敬)·겸양과 너그러운 용서와 근검을 위하는 것이 모두 ‘덕(德)’에 해당한다 하여 묘우를 상덕사(象德祠)라 했다. 상덕사는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고, 서계 선생과 두 아들 월담·국원이 배향되어 있다.
또, 서원에 오는 사람은 모두 세 분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덕을 지켜 존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게으르지 않게 뛰어나게 하라는 뜻으로 서원을 복원하면서 지은 강당을 정도(正道)라 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솟을 대문으로 세운 내삼문은 소수문(昭修門)이고, 향사일(享祀日)은 음력 3월 중정(中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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