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3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3. 격랑의 시대, 재상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대감

빛마당 2015. 3. 27. 12:17

격랑의 시대, 재상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대감


금 중 현*

 조선 500년에 벼슬이 정승자리에 까지 올랐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이요, 한 시대를 풍미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비켜가지 못하여 훌륭한 치적과 충의 정신이 가리워진 경우도 있으니 좌의정을 역임한 동원 김귀영대감이 아닌가 한다.

동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문(名門)이었던 상산김씨 상산군 김득제(金得齊)의 자손으로 조선 중종 15년(1520)에 할아버지 김사원(金士元)공의 근무처였던 청풍(淸風)관아에서 태어나 선조 27년(1594) 임진왜란 격랑 중에 두메산골 희천(熙川)유배지에서 75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임진왜란 전 동원의 벼슬 길은 순탄하여 판서를 8번이나 역임하였고 명나라 사신으로 9번을 다녀 왔으며, 호당(湖堂)에 3번 뽑히고 학문과 도덕의 종장(宗匠)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 대제학을 6번이나 역임한 학자요, 문장가로서 상주를 빛낸 인물이다.

동원은 13세에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삼휴당(三休堂) 윤관(尹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18세가 되던 해에 스승의 딸 윤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1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뒤 28세가 되는 명종 2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라는 첫 벼슬길에 올라 내 외직(內外職)을 두루 거치면서 화려한 환로(宦路)를 지났으며 54세가 되던 홍문관 대제학 때는 왕명으로 황산대첩비문(黃山大捷婢文)을 지은 문장가였다.

동원은 47년간의 벼슬길에 있으면서 늘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 하였다. 이를 위하여 어느 편에 일방적으로 서기를 꺼려하고 잘못된 일이면 어김없이 차자(箚刺)를 올려 바로 잡도록 하였다. 특히 조정 중신들의 부정한 행위에는 관용이 없었다.

예를 들면 명종 5년 부제학 경혼(慶渾) 등과 함께 경상도관찰사 구수담 등을 가볍게 견책함이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고, 명종 6년에는 당대의 권력자였던 영중추부사 이기(李芑)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 하는 담대함이 있었다. 명종 19년(1564) 대사헌 재직 시에는 왕도(王道)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그 유명한 진폐8조소(陳獘八條疎)를 올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중에서 가장 큰 폐단 8가지를 조목조목 들어 상소 직언한 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하고

둘째 : 사기는 당연히 진작시켜야 하며

셋째 : 염치는 당연히 권장하여야 하고

넷째 : 교화를 흥기 시키는 요점은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좋은 풍습을 조정과 고관대작에서부터 잘 길러 백성들이 본받도록 하여야 하며

다섯째 : 정치하는 도는 관원의 임명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니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고 임명하는 것이 공정하게 이루어 져야하고

여섯째 : 학교는 많은 선비를 길러내어 풍화(風化)를 일으키는 곳이니 도덕적으로 휼륭한 선생이 천거되어 스승으로서 도리를 다하므로 우수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다.

일곱째 : 국가의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고 백성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니 정당한 세금을 받고 부역도 농한기에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역사(役事)를 잘 살펴야 하고

여덟째 : 내간(內間※왕후)의 별진(別進※특별한 진상품)이나 기타 내수사에 진상할 물건을 거둬들이는 것이 부당한 경우가 있으니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명종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놀라움을 표하고 자세히 살펴서 이와 같은 폐단이 없도록 하겠다고 실록에 전하고 있다.

이처럼 동원이 지적한 8가지의 잘못된 정사(政事)는 현대사회에도 얼마 던지 있을 수 있는 일인 만큼 현대 위정자에게도 귀감으로 삼을 것들이라 할 수 있다.

1592년(선조 25) 민족 최대의 외침을 받은 임진왜란은 동원에게 일생 일대의 큰 시련이었고 그로 인하여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시 동원의 나이는 73세의 노령으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관직에 있었다.

조선의 중앙군이 상주북천 전투에서 왜적과 처음으로 싸웠으나 800여 명이 순국하는 참해를 당하고 이어서 충주 탄금대 신립 부대가 또 다시 무너지자 한양 도성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선조 임금은 앞장서서 천도(遷都)를 논의 하였으나 동원은 천도에 반대 하면서 한양을 사수하고 명나라에 원병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천도가 결정되었고 선조 임금은 평양으로 의주로 몽진(蒙塵)을 하게 되니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국정은 혼란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임란전쟁 초기 선조 임금의 파천에 대하여 동원은,

“종묘와 원능(園陵)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을 고수하여 외부의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진언하였고 동원의 말에 신잡(申磼)⋅박동현(朴東賢) 등이 파천의 부당성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파천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고 그대로 강행하였다. 파천이라고 함은 바로 임금과 황실의 피난이요 조선정부의 이동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최고 통치기관이 외침을 받아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 아닐 수 없고 그 치욕과 수모는 상상만 하여도 몸서리치는 일이다. 임진 4월 29일 드디어 선조 임금은 피난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4월 13일 왜적의 부산포 함락이 있은 뒤 불과 16일이 지난 때였다.

임금이하 조정의 피난길은 비참하고 참혹했다. 임금의 호종(扈從)은 당시의 우의정이었던 윤두수(尹斗壽)가 총괄하고 따르는 관원이 채 100여 명정도 였다고 한다. 당일 정오에 벽제관에 도착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일행은 모두 비를 맞아 처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호종 행렬에는 탈출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임진강을 건너 밤이 되어서야 동파에 도착하였는데 하루 종일 먹지 못하였고 임금을 호위하는 하인들이 식량을 훔쳐가 임금의 식량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처참한 광경을 어디에 형언하랴

국왕의 피난길 연변의 민중은 실망과 통곡의 소리가 하늘에 닿아 민심과 국왕의 사이는 통한의 물결만 넘칠 뿐이었다.

왕실의 피난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 선조 임금은 평양으로 향하고,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은 동원과 윤탁연(尹卓然)이 받들고, 순화군(順和君)은 한준(韓準)과 이개(李槩)가 받들어 함경도 회령으로 가게 되었다. 피난길에 두 왕자에게는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하지 못하도록 조정의 지시가 내려지고 6월 4일에는 동원 일행이 보낸 치계(馳啓, 말을 달려 임금에게 아룀)가 있었는데

“왕자들을 나누어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성념(聖念)의 소재는 실로 보통이 아니시건만 신들이 위유(慰諭)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눈물을 닦으면서 우러러 절을 하고 기뻐하며 생기가 도는 것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컨대 천만마디의 빈말은 조그마한 실제의 혜택만 못한 것입니다. 본도는 근래에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함으로 인하여 사람은 집집마다 다 전쟁에 나아갔고 마굿간에는 한 필의 말이 없습니다. 목장의 말 일백 필을 요로(要路)의 쇠잔한 역에 지급하고 혹은 재능이 있으나 말이 없는 병졸에게 지급 하소서. 그리고 함경도의 공물(貢物) 및 진상하는 물선(物膳)등을 감면 하라는 은명(恩命)을 내려 백성들이 다시 생기를 찾도록 하소서”

라고, 하는 보고가 있었다.

선조는 이 보고서를 보고 두 왕자의 피난길이 무사하고 전쟁의 어려움에도 왕정의 시정은 변함없다는 것으로 비교적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9월 4일에는 두 왕자와 함께 동원을 포함한 재신(宰臣) 5~6명이 왜적에게 모두 사로 잡혔다는 보고가 있으니 청천벽력의 비보였다.

아들이 적군에게 사로잡혔다하는 소식에 놀란 선조는 다급히 은밀하게 계책을 써서 탈출시키도록 하라고 명하고 사로잡힌 연유를 추궁한바 9월 16일 회령 땅을 다녀왔다는 이희득(李希得)이라는 사람이 이르기를, 적장이 명령을 내려 현상금을 걸고 왕자와 대신을 사로 잡았다고 하였다.

선조는 이 사실을 다시 경기관찰사 심대(沈岱)를 불러 물어 본바,

“함경도의 주회인(走回人) 장복중(張福重)이 병조좌랑 서성(徐渻)을 따라다니며 강원도 지방에서 군사를 모으다가 왜적에게겨 함경도 함흥부(咸興府)로 들어갔는데 왜적이 대거핍박하자 원임(原任) 의정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판중추부사 황정욱 ..... 중략 ..... 제1왕자와 제5왕자(임해군과 순화군)를 받들고 북도의 회령진(會寧鎭)으로 피난하여 들어갔다고 합니다. 또한, 북도절도사 한극함(韓克諴)과 남도절도사 이영(李瑛)등은 만령(蔓嶺)싸움에서 패하여 종적을 모르게 되었고 왕자와 김귀영 등이 한꺼번에 사로 잡혔다고 합니다."

라고 하여, 피납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선조는 두 아들과 대신들이 피납된 것을 확인하고 치욕과 복수심에 불타는 심정으로 9월 25일 명나라 요동 도지휘사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기를,

“함경도는 선조(先祖)가 기업을 일으킨 땅이고 또 그 지세가 견제하기에 재신 김귀영 등에게 큰 아들과 함께 함흥부로 나아가도록 하고 황정욱에게는 다섯 째 아들을 강원도 철원부에 머무르면서 군사를 모집 왜적의 길을 막아 끊음으로써 형세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 중략.... 그러나 모두 사로잡히게 되어 골육을 보전하지 못 하였으니 비통하고 분합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임시로 국사를 처결하며 문무배신을 거느리고 본도 성천부에 머물면서 위병을 규합하여 적도들을 소탕할 것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 중략 ..... 바라건데 속히 전보(轉報)하여 군사를 진발시켜 구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호소하였다.

이렇게 왕자를 구출하고자 노심초사 하는 선조에게 안변에서 비밀문서가 왔다. 피납된 두 왕자와 김귀영, 황정욱 등이 보낸 언서(諺書, 한글편지)였는데 금, 은 호피, 표피 등 귀중품을 왜적의 통사(通事)를 통하여 피납처에 들여 보내주면 탈출을 기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선조는 이 편지를 보고 즉시 이 물건들을 준비하라고 비변사에 지시하기를,

“왕자와 재신들까지 포로가 되어 적정(賊庭)에서 무릎을 꿇는 곤욕을 치르고 있다니 명절(名節)이 깨끗이 사라졌다. 스스로 도망해 오는 것은 모르겠으나 조정에서 뇌물을 주고 데려온다는 것은 사리에 어떨지 모르겠다.”

하고, 국가로서 굴욕적인 일을 하는 것에 체면을 논하자 비변사에서는,

“사로잡힌 재신들은 본래 왕자를 배행하던 사람들로 계책이 잘못되어 결국 사로 잡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일이 놀랍고 그 정성이 애처롭다 하겠습니다. 그들이 굴욕을 감수하는 것은 아마 왕자 때문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국가에서는 훈구를 돌보는 뜻에서 귀중품을 나누어 주더라도 돌아올 수 있게 도모하는 것도 크게 해로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어명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경성판관 이홍업이 오랫동안 적에게 잡혀 있다가 성천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손에는 포로가 된 두 왕자와 재신들 그리고 뜻밖에도 적장(敵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 중에 한극함의 서장에 이르기를,

“일본에서 차정(差定)되어 나온 장수 중 한사람인 청정이라는 장수가 신들을 불러 일본이 조선과는 오랫동안 인국의 수호를 닦아 왔으므로 당초부터 다투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대마도주 종의조(宗儀調)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두 나라의 서계(書契)에 막히는 것이 많아졌고 피차의 사이를 이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므로 이미 죄를 받아 복주(伏誅)되었다. 당초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바로 침범코자 귀국의 길을 잠깐 빌리고 또 선도(先導)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군행(軍行)이 편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들이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부산등지에서 먼저 무기를 썼기 때문에 난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 중략 ..... 싸우려는 나라는 쳐서 멸망시키고 강화하려는 나라와는 굳게 우호를 맺고 있다. 귀국의 군현(郡縣)은 거의 일본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왕이 다시 인국과의 맹약을 맺으려 한다면 그 중 한두 도(道)를 귀국에 돌려줄 것은 물론 전처럼 신의를 지킬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을 대왕께 전하도록 하라. 평안도에서 사신을 보내되 좋은 뜻으로 허락해 온다면 곧 바로 관백에게 아뢰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합니다.”

라고, 하는 내용이다.

바로 왜적이 조선을 침략한 마각(馬脚)을 들어낸 내용이니 이른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의 땅을 잠깐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황당한 논리요, 조선의 국토는 이미 대부분 점령하였으니 국토의 일부분만 두고 이 시점에서 항복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와 재신들이 포로가 되어 있는 즉 이를 미끼로 위협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원이 보낸 서장에는 7월 24일 회령부에서 사로잡혔으나 그 일의 곡절을 보고할 길이 없어 애만 태울 뿐이었고 지금은 안변부에 압송되어 머무른지 이미 한 달쯤 되었으며 겨우 목숨만 지탱하고 있다는 내용과 왜적의 장수가 선조 임금의 행재소(行在所)를 다그쳐 묻기에 어느 곳에 계신지 알 수가 없다고 답하였다고 하는 글이었다. 강화는 곧 항복을 하라는 것이니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내용이다. 이때 왜적은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공격하여 크게 패하게 되자 왜적의 세력은 약화되고 이번에는 명나라 군 수뇌부와 조선의 땅을 두고 강화를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동원이 적진에서 풀려서 행재소에 돌아왔다. 동원이 돌아온 것은 왜적 적진에서 몰래 탈출한 것이 아니고 아마도 두 왕자와 관원들과 함께 왜적의 포로가 된 입장에서 강화를 빌미로 왜적을 설득하여 풀려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왜적들은 두 왕자와 다른 재신들을 포로로 잡고 있으니 노쇠한 동원까지 붙잡아 두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르되 좌우간 왜적으로부터 풀려 나오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포로가 되었을 적에는 온갖 고초를 겪고 부인은 적들의 핍박에 못 이겨 목을 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그 수모와 아픔은 무엇에 비유하랴! 그러나 돌아온 동원에게는 더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정의 원로 대신들은 동원이 왕자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들고 피난을 갔던 조정 중신으로서 적에게 포로가 된 사실 자체도 잘못된 처사였고 왜적들의 회유에 넘어가 화의(和議)를 시키겠다고 몸을 빼서 돌아왔으니 오히려 죄를 주어야 한다고 들고 있어났다. 두 왕자와 동원 그리고 황정욱 등 재신들이 포로가 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바 왜적이 현상금을 걸어 이 피난 행렬이 붙잡혔다고 하나 사실은 조선 조정에 원한을 품은 국경인(鞠景仁) 무리의 반란으로 포로가 된 것이다.

반란자 국경인은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는데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어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서 왜적이 회령에 가까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삼촌 국세팔과 명천부의 아전 정말수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피난길에 있던 두 왕자와 동원 등 재신들 모두를 붙잡아 왜적에게 넘겨 피할 수 없는 포로가 된 것이다.

반란자 국경인은 뒤에 의병장 정문부(鄭文孚)대장에 의하여 참살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돌아온 동원에게는 계속하여 핍박이 가해졌다. 선조는 동원의 일에 대하여 대신의 신분으로서 적의 뜨락에 무릎을 꿇고 오직 강화를 구걸하는 것만이 능사인 줄로 알아서 왕자를 버리고 빠져나올 것을 도모한 바는 책망 할 가치조차 없다고 하고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결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윤두수는

“삼가 살펴 보건데 무너지는 기강을 정돈하고 인륜을 붙들어 세운 것이 지극하다. 다만 김귀영은 70세 노인의 몸으로서 일이 잘못되어 붙잡혔는데 죽지 않은 것이 죄다 할 것이다. 그러나 왕자가 함께 계셨으니 그가 자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적의 뜨락에 무릎을 꿇고 강화를 구걸하는 것만이 능사인줄 알았다는 말로써 그를 죄준다면 아마도 미안한 일이 아닐까 한다. 현재 빠져 나온 것도 왕자의 분부 일 것이니 이 역시 독단적인 사계(私計)는 아니다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생명을 보전하려 하기를 언자(言者)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였겠는가?”

라고, 동원의 사정을 변호하자, 선조 임금은 동원을 감옥에 가두지 말고 유배지로 귀양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왕명이 있자 75세의 원로 중신 동원 김귀영은 서둘러 유배지 회천으로 떠나게 되었고 떠난 지 몇일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족적 치욕의 격랑에서 애처롭게 생을 마감하였다. 결국 왕자를 피난길에 호종하다가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불운한 재상이 되고 말았다.

불운의 재상 동원 김귀영은 억울하게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난 1664년(현종 5) 동원의 손자 김수창의 상언(上言)으로 벼슬이 회복 되었고, 이어서 숙종 년간에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伸寃)되었다. 동원이 세상을 뜨고 난 뒤 그의 아들 김개(金闓)는 1618년 허균(許筠)의 역모에 관여하였다는 누명을 입고 옥에서 자결하니 이후 동원의 가문은 몰락한 가문으로 전락하여 문적(文蹟)들은 흩어지고 덕행과 충의의 행적은 의도적으로 인멸 되거나 잊어지는 불운의 연속 되었다.

동원이 타계한 이후 300여 년이 지난 1935년에 그의 12대손 김교회 공에 이르러 겨우 흩어진 문적을 모으게 되었고 행적을 천양(闡揚)하기에 이르렀다. 50여 년 간 관직에서 불편부당으로 공정한 정사(政事)를 펼치고 임진왜란에는 두 왕자를 보호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포로의 몸에서 풀려났으나 끝내는 유배를 당하고 그 길에서 생을 마감한 동원은 불운한 재상 이었지만 조정 중신으로서 국난에 책임을 다 한 상주를 빛낸 인물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