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5호

상주 경찰의 연혁과 제도의 정착

빛마당 2016. 3. 30. 16:24

상주 경찰의 연혁과 제도의 정착

상주향토문하연구소 연구위원

上州文化硏究會 연구위원

상주시청 문화융성담당

金 相 鎬

 

. 머리말


우리나라 경찰행정은 고려시대부터 실시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에는 경찰과 군사의 개념을 혼용하였고, 중앙에서는 병무에 이군육위를 두어 군사와 경찰 행정을 관장하였다. 또한, 현재의 사법경찰은 형부, 특수경찰 업무는 중추원순마소어사대삼별초에서도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는 지방장관인 지주사(知州事)부사(府使현령 등이 일반 지방행정업무와 함께 경찰사법군사세정(稅政) 등 국가지방행정의 전부를 통합,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경찰행정은 일원화되지 못하고 다원적으로 운영되었다. 중앙에서는 각각 그 소관업무에 위배되는 사항을 스스로 단속, 처벌하는 권한을 부여하였으므로 각 관아 스스로가 경찰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업무는 현재와 같은 경찰행정과는 다르게 주로 단속행정이었다.

중앙경찰기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형조와 의금부사헌부한성부가 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부윤부사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이 지방행정과 사법업무 일체를 관장하였다. 특히, 도 등의 각급 지방관청에는 중앙의 6조와 같은 6()이 있었다. 전문적 경찰기관으로는 포도청암행어사가 있었으며, 특수 경찰 활동으로는 야간의 통행을 제한한 야금제(夜禁制)와 호패제가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서양 제국과의 국교를 맺으면서 서양의 근대제도가 들어오면서 경찰의 이념과 제도가 도입되어 경찰의 기원을 이루었다.

18947경무청관제직장(警務廳官制職掌)행정경찰장(行政警察章程)에 따라 좌우 포도청을 폐지하고 서울에 경무청을 창설하여 내무아문(內務衙門)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으며, 1895년 칙령 제85호로경무청 관제를 제정하였다.


19457.3.1절 기념행사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도 현재의 경찰기능을 가진 행정기구는 있었으나 현재와 같이 전문화된 것은 구 한말부터였고, 일제강점기에 정착되어 광복 이후 한국경찰이 창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경찰의 역사는 해방이후부터 소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한국인이 포함된 일제의 한국인 통치활동의 통제기구로 활용되어 왔고, 한국인 수탈과 고문의 역사이기 때문에 경찰의 역사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이 크다. 현재의 경찰역사는 구한말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경찰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도 경찰의 역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자료는 일본인 주도하에 만들어지고 친일한국 경찰의 미군정 참여로 인해 근대임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희소하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상주 경찰의 성립 등 연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896년에 일본식 경찰제도로 개혁하고, 일본인 경무고문(警務顧問)을 초빙하여 경찰제도를 시작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保護條約)에 따라 각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도에 경무서(警務署)를 두고, 관찰사의 지도감독을 받아 도내 수개소의 분서를 두게 되었다.

경무서에는 한국인 경무관(總警級), 분서에는 총순(總巡, 警監級), 그 밑에 권임(權任, 警査級)과 순사(巡査, 巡警級)를 배치하였고, ()에는 경무 고문보조관인 경시(警視, 總警級)를 두고, 분견소에 보조관인 경부(警部, 警監級), 그 밑에 보조원으로 순사를 배치하여 경무서급분서의 사무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 한국인 경찰관의 교양교육을 맡았다.

상주에서는 190612월 경무 분서급 헌병 분견소(憲兵分遺所)를 두고 일본인 이노우에(井上) 고문보좌관과 보조원 25명을 배치하였다.



헌병분견소

190710월 한국정부는 경찰사무를 통감부(統監府)로 위임하고, 고문제도는 폐지하는 한편 경무청을 경시청, 경무분서를 경찰서로 개칭하고, 경찰의 계급도 종래의 경무사(警務使), 경무관, 총순, 권임, 순사 등의 명칭을 경시총감, 경시경부, 감독순사, 순사 등으로 개칭하였다.

19088월에는 지방관제의 개정으로 관찰사 밑에 경찰부를 두고 일본인 경시(警視)를 경찰부장에 임명하였으나 치안업무는 헌병과 경찰이 같이 맡고 있어 일원화되지 못하였다.

상주경찰서

 이때 상주에서도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어 경찰사무 일체를 집행하였다. 관할 구역 내에 낙동, 공성, 함창, 각면에 헌병분견소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때에는 화서, 화북은 제외되었으나 1911920일에는 관할구역에 편입되었다.

19198월에는 헌병제도를 폐지한 후 경찰제도를 확립하고 경찰의 계급도 순사, 순사부장, 경부, 경부보, 경시 등으로 호칭을 하였다. 이때 상주경찰서를 설치하여 헌병분견소의 사무를 인수함과 동시에 종전의 헌병분견소 출장소를 모두 경찰관주재소(支署)라 개칭하였다.

각 면()에는 주재소 설치가 원칙으로서 사벌면, 중동면, 공검면, 외남면, 은척면에 각각 경찰관 주재소를 신설하였으나, 외남주재소는 1925117일에 폐지되었다.

19201231일에는 사업비 16,900원을 투입하여 경찰서 신축에 착수하여 74.5평의 청사와 창고 8, 기타 부속건물을 1921612일 준공하였다. 이 청사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소방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25년 당시의 상주경찰서 정원은 일본인 경부 1, 한국인 경부 1, 일본인 경부보 2, 순사 44, 한국인 순사 34명이었으며, 1937년에는 본서와 16개의 주재소에 83명의 경찰 공무원이 근무하였다.

 

구분

경부

경부보

순사부장

경사

주재소수

정원

83

1

3

17

62

16

 

19446월에는 성하동에 석회제 양옥 2층 건물의 본관과 부속건물을 신축 준공하고 이전하였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였고, 경무청을 설치하여 치안을 담당하여 왔으나 1905년부터는 일본인 경시, 경무고문등이 맡았고, 1907년에 와서는 사실상 한국경찰의 전권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수비대-헌병대-경찰 형태로 치안을 유지하였다. 상주 수비대는 1907년 여름 한국군대가 해산되고 의병운동이 강원도, 경상도북부, 충청도에 전개됨에 따라 190712월부터 대전의 보병 제47연대 산하의 각 대대가 상주수비대로 배치되었다.

 

구분

소속

상주

낙동

옥산

화령장

함창

1907.12

보병

47연대

1대대

보병분대

 

보병소대

보병소대

1908.5

상주수비구

대대

보병분대

보병분대

대전수비구

보병소대

보병중대

1908.11

1대대

 

보병분대

 

보병중대

1909.8

보병

1연대

보병중대

-

-

-

-

出處:朝鮮駐箚軍歷史, 日韓外交資料集成.金正明編,巖南堂,1967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지역의 치안을 헌병과 경찰이 협업을 하였으며, 점령지역으로서 군사 위주의 헌병 주관으로 치안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區 分

尙州

洛東

玉山

(功城)

功東

芝山

(牟西)

壯岩

(化北)

佳谷

(外西)

化東

咸昌

胎封

柿岩

(利安)

1908. 7.18

73

48

25

12

12

 

 

 

 

 

12

12

 

 

1909. 7. 1

87

50

10

10

10

10

 

 

 

 

10

27

10

 

1911. 1. 1

89

50

12

10

10

 

10

 

 

 

10

27

10

 

1911.10.20

80

45

15

7

9

 

7

6

 

 

7

24

5

 

1912. 7.30

81

45

16

7

9

 

7

6

 

 

7

24

5

 

1913. 4. 1

82

45

17

7

6

 

7

6

 

 

6

23

 

10

1913. 9.12

85

48

20

7

6

 

7

6

 

 

6

23

 

10

1914. 3. 1

83

47

26

8

7

 

7

6

7

 

7

9

 

6

1915 .6. 1

81

46

24

8

7

 

7

5

6

3

7

9

 

5

出處:朝鮮憲兵隊歷史, 不二出版, 2000

 

이때 1908년 처음 배치된 헌병대원 73명은 대구분대 소속의 병력이 상주, 낙동, 옥산, 화령장, 함창에 배치되었고, 190987명은 김천분대 40명은 상주, 낙동, 옥산, 공성에 배치되고, 화령장, 함창, 태봉 47명은 함창분대 병력이 배치되었다. 19111월에는 김천분대원이 상주에 2명이 증원되고 공성에 배치되었던 10명이 모서에 배치되었다. 191110월에는 상주에 3명을 증원, 낙동에 3, 옥산 1, 지산 3명을 감원하고 화북 장암에 6명을 신규 배치하고, 화령장에 김천분대에서 7명을 배치하고 함창, 태봉 29명은 함창분대에서 배치하였다. 1912년에는 전년과 같은 배치이나 상주에 1명이 증원되었다. 19134월에는 김천분대원을 상주에 1명을 증원하고, 옥산에 3명을 감원하고, 함창분대원은 태봉에 5명 감원하고, 시암에 10명을 신규 배치하였다. 19139월에는 김천 분대원을 상주에 3명을 추가하여 전체 85명이 배치되었다.

1914년에는 각 분견소에는 모두 상주분대원이 배치되었으며, 상주 6, 낙동 1, 옥산 1, 화령장 1명을 증원하고, 외서 가곡에 7명을 신규 배치하는 한편 함창에 13명 감원하여 전체 83명이 되었다. 1915년 와서는 상주에 2, 장암 1, 가곡 1, 시암 1명을 감원하고, 화동에 3명을 추가 배치하여 전체 81명이 되었다.

조사시기

이름

관직

조사시기

이름

관직

1908

洪昌燮

警部

1932

三好廣士

警部補

1920

米田富藏

道警部

1932

治田都市

警部

1920

澤盛治

道警部補

1933

治田都市

警部

1920

吳鶴泳

道警部

1933

三好廣士

警部補

1920

岩村猪佐夫

道警部補

1933

寺岡登一

警部補

1921

福谷與藏

道警部補

1933

孫甲祿

警部補

1921

米田富藏

道警部

1933

崔錫鉉

警部

1921

澤盛治

道警部補

1934

崔錫鉉

警部

1921

吳鶴泳

道警部

1934

鈴木昌秋

警部補

1922

大石直一

警部補

1934

三坂秋儀

警部補

1922

福谷與藏

警部補

1934

治田都市

警部

1922

蘇鎭殷

警部

1934

孫甲祿

警部補

1922

丸山省藏

警部

1935

鴻巢守

警部

1923

丸山省藏

警部

1935

崔錫鉉

警部

1923

蘇鎭殷

警部

1935

靑井嶺之進

警部補

1923

大石直一

警部補

1935

三坂秋儀

警部補

1923

久野治七

警部補

1935

孫甲祿

警部補

1924

井上茂

警部

1936

鴻巢守

警部

1924

久野治七

警部補

1936

渥美敬次郞

衛生技手

1924

大石直一

警部補

1936

崔奉達

警部補

1925

大石直一

警部補

1936

三坂秋儀

警部補

1925

久野治七

警部補

1936

靑井嶺之進

警部補

1925

岡本修一

警部

1936

崔錫鉉

警部

1926

墨田民

警部補

1937

古屋幸平

警部補

1926

岡本修一

警部

1937

崔錫鉉

警部

1926

九野治七

警部補

1937

金相賢

警部補

1927

墨田民

警部補

1937

佐田義人

警部

1927

岡本修一

警部

1937

渥美敬次郞

衛生技手

1927

久野治七

警部補

1938

渥美敬次郞

衛生技手

1928

岡本修一

警部

1938

佐野昇

警部補

1928

鴻巢守

警部補

1938

國宗正雄

警部補

1928

李東燮

警部補

1938

金相贊

警部補

1928

江川道

警部補

1938

崔錫鉉

警部

1929

江川道

警部補

1938

佐田義人

警部

1929

久枝賴三

警部

1939

佐田義人

警部

1929

崔錫鉉

警部

1939

崔錫鉉

警部

1929

李東燮

警部補

1939

西崎勇吉

警部補

1930

久枝賴三

警部

1939

渥美敬次郞

衛生技手

1930

崔錫鉉

警部

1939

國宗正雄

警部補

1930

魯璣柱

警部補

1939

金相䝾

警部補

1930

小林貢

警部補

1940

渥美敬次郞

衛生技手

1930

江川道

警部補

1940

田平伊平

警部

1931

久枝賴三

警部

1940

山本祥資

警部

1931

金德根

警部補

1940

劉億鍾

警部補

1931

崔錫鉉

警部

1940

小佐佐述一

警部補

1931

三好廣士

警部補

1940

牛島吉平

警部補

1931

寺岡登一

警部補

1941

柴勇

警部

1932

崔錫鉉

警部

1941

野田茂

警部補

1932

孫甲祿

警部補

1941

三村和夫

警部補

1932

寺岡登一

警部補

1941

江原利一

警部補

 

초기의 상주경찰서장과 간부급의 명단 파악은 어렵다. 시기성으로 볼 때 헌병대와 경찰의 업무는 대부분 기밀로 분류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로서 광복과 더불어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조선인을 탄압하는 지방 조직이었기 때문에 광복이후 보복 등 테러의 위험성 때문에 경찰 스스로 자료를 소실 시켰을 가능성도 큰 분야이다. 기존의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상주 경찰 초기의 경찰서장을 추정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90814: 井上安定(尙州警察分署長 警部)

- 19085: 出野務(尙州警察分署長 警部)

- 1908: 洪昌燮(警部)

- 1908919091: 中川正孝(尙州警察署長 警部)

- 19091191010: 林和一(尙州警察署長 警部)

- 1920: 米田富藏(道警部)

- 1920: 澤盛治(道警部補)

- 1920: 吳鶴泳(道警部)

- 1922: 丸山省藏(道警部)

- 1924: 井上茂(道警部) (이노우에 시게루)

- 1925: 岡木修一(道警部)

19061919년까지는 헌병분견소에서 경찰업무 수행 시기이며, 19191945년까지는 경찰에서 업무 수행 시기이다.

특히 경찰서장의 비()는 찾기가 어려운데 현재의 경찰서 전정에 청사를 건립하고 공로비를 세웠는데, 누가 세웠는지 훼손이 심하여 알 수는 없으나 자연석 중앙부에 廳舍長遠功勞碑’, 그 우측에 ○○○署長, 좌측에 檀紀四二○○, 尙州警察署長 ○○○○을 작은 글씨로 각자하였다. 현재 청사가 위치한 곳에 청사 건립은 단기4277(1944) 6월이며, 그 이전에는 단기4254(1921) 612일 왕산 남쪽에 건립하였다. 글씨체로 보아  제 강점기에 유행하던 글씨체로서 두 곳 모두 일제강점기 때 이 비가 옮겨지지 않았다면 현 청사의 위치는 상산관을 이전하고 경찰서가 건립된 곳이므로 1944년 건립된 비라고 할 수 있겠다.

 청사건립기념비


 

 

. 미군정기(美軍政期)


경무부 기구표

 

미군정기(美軍政期)는 미육군 제24군단이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의 포고에 따라 일본이 항복한 이후부터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인 194598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부터 19488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까지 남한을 통치한 약 3년의 기간이다. 이때에도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므로 국내의 치안은 미군이 맡았다.

이때에는 1945817일 치안대가 결성되고, 1021일 미군정청에 국립경찰이 창설되면서 각도에 경찰부를 설치하고, 조병옥이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하였다. 혼란한 국내정세에 따라 조직도 경무국에서 경무부로, 내부의 실과가 신설 또는 통폐합하는 등 194893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미군정 기간의 주요 연표를 보면

연월일

연혁

1945.

8.

6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8.

9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8.

15

광복(건국준비위원회 발족)

 

8.

17

보안대, 학도대, 치안대 결성

 

9.

13

경찰관 교습소 발족

 

9.

14

일본인 경무국장 파면

 

10.

16

이승만박사 환국

 

10.

21

국립경찰 창설(미군정청에 경무국 설치)

 

 

 

각도 경찰부 설치(조병옥 경무국장 취임)

 

10.

24

경제경찰과 폐지

 

10.

27

공안국 위생과 보건후생국으로 이관

 

10.

30

형사조사과 설치

 

11.

1

치안관제도 신설

 

11.

6

조개옥 경기도 경찰부장 임명

 

11.

15

경찰간교습소를 조선경찰학교로 개칭

 

12.

27

도경찰부 독립(도지사권한의 경찰행정 분리)

 

 

 

도에 총무, 공안, 수사, 사찰, 통신과 설치

1946.

1.

16

경무국을 경무부로 승격(부장 조병옥 취임)

 

 

 

계급을 경무부장, 도경찰부장, 도경찰부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으로 구분

 

1.

24

경무부 수사국에 감식과 신설

 

2.

25

각 도경찰부 기마대 신설

 

3.

5

철도관구경찰청 창설

 

4.

11

도경찰부를 경찰청으로 개칭

 

 

 

계급을 경찰청장, 부청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으로 함

총무과를 경무과, 공안과를 보안과, 주재소를 지서로 개칭하고, 경찰관 신복제 제정함

 

7.

1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 신설

 

7.

16

국립경찰학교 졸업(배치)

 

8.

15

조선경찰학교를 국립경찰전문학교로 승격

 

10.

2

경찰관 칼빈총 휴대(10~11월 경찰 집중 피습, 피격)

 

12.

25

전남해남 폭동(경찰 15명 사상, 지서 12개소 파괴)

1947.

2.

17

서울,부산,대구,인천 등 주요도시 여자경찰서 신설

 

3.

6

경무부 및 관구 경찰청에 경찰공보실 설치

 

8.

12

각 관구경찰청에 통신과 신설

 

9.

19

경찰감찰제도 신설, 관구경찰청 감찰실 설치

 

12.

25

중앙경찰위원회 설치

1948.

7.

5

관구경찰청 주요도시 특별경비대 신설

 

9.

3

대한민국정부 수립(국립경찰 지휘권 인수)

 

 

 

경무부는 내무부장관, 도 경찰청은 도지사 산하 경찰권 이양

 

 

 

경찰계급을 경무관, 총경, 경감, 경위, 경사, 순경(감찰관 폐지

다음과 같다.

 


 건준전단(경인)

 

일제강점기의 경찰에 의하여 온갖 고난을 겪어온 국민은 해방 후에도 경찰을 우호적인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직업이었고, 한국인 경찰도 일제의 탄압에 동조하여 민족을 탄압하였으므로 전국 각처에서 집단폭행 대상이 되고, 살해까지 당하여 다른 지방으로 은신하는 등 구명에 급급한 시기였다. 미군정은 기존 행정체제를 인정한다는 포고문 1호로 복귀하게 하였으나 복귀율은 20%이하였다. 이는 일본의 지배 최선봉에서 같은 민족을 억압하였던 친일경찰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당시의 조선인 경찰관 수는 다음과 같다.

구분

경시

경부

경부보

순사

한국인

7,968

8

75

172

7,758

일본인

14,747

77

482

882

13,307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경찰들은 식민지 지배의 직적 대행자로서 독립을 방해한 반민족행위의 전형적 집단으로서 경찰행정 기술을 가진 자들로서 미군정은 이들에게 생존을 길을 터주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새로운 애국자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했다. 19461월 국장급이 한국인으로 교체되면서 조병옥과 장택상이 경무국장과 수도경찰청장으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간부 충원을 했으나 간부는 친일경찰의 핵심 인물로 채워졌다.

이 때 간부는 80%이상이 친일 경찰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국민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10월 이후 경찰 군정에 대한 비난과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직위

총인원수

식민경찰 출신

비율(%)

치안감

1

1

100

청 장

8

5

63

국 장

10

8

80

총 감

30

25

83

경 감

139

104

75

경 위

969

806

83

 

한편 상주의 건국준비위원회는 815일 광복 이후인 17일 상주국민학교 강당에서 지방의 유지 수백 명이 모여 건국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나 지도자 선임에서 노소(老少) 양파의 대립으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18일 오전 박정소(朴正紹), 석응목(石應穆) 등의 중재로 익찬회(翼贊會,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위원으로 노소 양파 각 15인씩 30명이 선출되었다. 익찬회는 오후 3시에 상주경찰서 옥상에서 초대회장 박정현(朴正鉉), 부회장 최상선(崔尙善). 조용연(趙龍淵)을 선출하고, 조직은 5부로 정하여 총무 박인옥(朴寅玉), 조직 박순(朴淳), 재무 차창섭(車暢燮), 선전 박동화(朴東和), 치안 석응목을 뽑았다.

915일에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에 민주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상주소방대(尙州消防隊)에 연락하여 출동할 것을 요청하였고, 918일 정오에 소방대는 성명서를 배포하고, 좌익계열의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찰관서를 급습하여 그들을 축출한 후 현직 경찰을 소집하여 무기고를 입수하고, 치안 유지를 확고히 하면서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930일 좌익계열의 인사들이 각 면 대표를 소집하여 상주국민학교 강당에서 논의한 후, 101일에 경찰서원들을 체포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고 사퇴를 강요하였다. 이에 당시 대구에 거주하던 상주 출신 인사 박인세(朴寅世)가 상주에 와서 상호 교섭을 적극 주선하여 화합을 권고한 결과 현직 경찰은 전부 석방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치안상태는 방임 상태였다. 그 후 10일 만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자 경찰관서는 현직 경찰에게 환원되고, 좌익계열의 인사들은 군청을 강탈하여 인민위원회 간판 아래 당원을 증모하고 세력을 확충하였다.

군정 경찰은 19461월에 그 제도가 크게 개편되었다. 경상북도의 경우 도경찰부장(道警察部長) 밑에 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을 두었으며, 각 시군에는 경찰서(警察署)와 그 아래 각 지서(支署)를 두었다. 지방경찰의 주재소(駐在所)는 이때부터 지서(支署)로 개칭되었고, 도경찰부도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으로 개칭되었으며, 경찰서는 관구번호제로 변경됨에 따라 상주경찰서는 제5관구경찰서(第五管區警察署)로 개칭되었다.

 

 

. 광복 이후의 상주경찰

상주의 경찰은 해방 직전 일제강점기인 1944년 청사가 완공되고, 그 이듬 해에 광복되었으나 미군정이 시작되어 혼란기를 맞고 곧이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勃發)됨으로서 이때의 경찰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도 일제강점기 경찰이 그 업무를 이어왔고, 그 당시 사회상황이 일제강점기의 탄압 경찰에 대한 보복 공격이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신분 숨기기에 급급하고, 그 행적을 없애기 위하여 그 당시의 자료들은 대부분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사회 안정이 이루어진 1957년의 자료를 보면 상주에는 본서에 경무, 보안, 경비, 사찰, 수사의 4의 계()와 직할 및 역전 2개 파출소, 17개의 지서를 두었다.

 

본서

파출소

지서

계명

반명

경무계

경무반, 통신반, 병사반, 경리반

직할파출소

역전파출소

17개 지서

보안계

행정반, 교통반, 녹화반, 위생반

경비계

경비반, 방호반

사찰계

서무반, 형사반, 분실반

수사계

수사반, 취조반, 형사반

1960년에 와서는 경찰서장 1, 경무계, 사찰계, 수사계의 3개 계를 두고 각계에 계장 1명과 경무계 직원 21, 사찰계 직원 25, 수사계 직원 18명을 두고, 본서에는 68명이 정원이었다.

파출소에는 직파(직할 파출소)에 주임(경사) 포함 12, 역전파출소에는 주임(경사)을 포함하여 6명을 두어 전체 18명이 배치되었다. 한편 17개 의 지서에는 107명이 배치되었다.

 

파출소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외남

내서

모동

18

7

5

8

6

7

4

6

6

모서

화동

화서

화북

외서

은척

공검

함창

이안

6

6

7

7

6

7

6

7

6

 

1965130일에는 북문파출소를 신설하였고, 1977316일에는 2급지 경찰서로 등급이 조정되었으며, 1972530일에는 경찰서장의 직급이 총경으로 통일되었다.

197884일에는 동문파출소가 신설되고, 1991321일 대지 2,471평에 건축면적 1,304평 콘크리트 슬라브 3층 건물의 현 청사를 개축 준공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199511일에는 사벌, 외서, 은척, 이안, 공검, 중동, 낙동, 청리, 공성, 외남, 내서, 화동, 모서, 모동, 화서, 화북, 화남지서를 파출소로 명칭을 개칭하고, 1998710일에는 외남, 화남파출소를 외남, 화남출장소로 개칭하였다.

200061일에는 화동, 중동파출소, 외남, 화남출장소를 화동, 중동, 외남, 화남분소로 개칭하였고, 200381일에는 파출소 및 분소를 4개 지구대 · 2개 특수파출소로 개편하였다.

2007430일에는 은척파출소를 개소하여 4개 지구대, 3파출소, 15개 치안센터로 체제를 변경하였으며, 200891일에는 3개 지구대, 6개 파출소, 13개 치안센터로 직제를 개편하였다.

2010330일에는 13개 파출소, 10개 치안센터로 직제를 개편하였고, 2012년 말 현재 경찰 공무원은 본서 102, 지구대 및 파출소 128명으로서 정원은 230명으로서 본서와 2개 지구대, 11 파출소, 9개 치안센터로 직제를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주경찰서 기구표

 

명칭

주소

관할구역

치안센터

중앙지구대

상서문로 63

 

북문치안센터

동문지구대

중앙로 371

 

역전치안센터

함창파출소

함창읍 중앙로 112

함창읍, 이안면

이안치안센터

사벌파출소

사벌면 덕담159

사벌면

 

은척파출소

은척면 봉중16

은척면, 외서면 일부

 

공검파출소

공검면 비재로 1288

공검면, 외서면 일부

외서치안센터

낙동파출소

낙동면 영남제일로 105

낙동면, 중동면

중동치안센터

청리파출소

청리면 원장123

청리면, 외남면

외남치안센터

공성파출소

공성면 공성중앙로 103

공성면

 

화동파출소

화동면 이소142

화동면, 내서면

내서치안센터

모동파출소

모동면 용호121

모동면, 모서면

모서치안센터

화서파출소

화서면 화령로 21

화서면, 화남면

화남치안센터

화북파출소

화북면 문장로길 1748

화북면

 

재직 기간

성명

직명

1945.09.301946.02.18

정후조

경감

1946.02.181946.10.02

천규문

경감

1946.11.201947.03.16

조준영

경감

1947.03.161947.06.27

강익선

경감

1947.05.201947.06.05

지용호

경위

1947.06.051947.11.17

윤상환

경감

1947.11.171948.11.24

이 박

감찰관

1948.11.241949.05.17

신완우

경감

1949.05.171950.05.07

박원달

총경

1950.05.071950.08.09

신상수

총경

1950.08.091950.09.24

김경섭

경감

1950.09.241952.02.01

김기현

총경

1952.02.011952.04.16

최창수

총경

1952.04.061952.10.11

박진방

총경

1952.10.111952.12.21

이의춘

총경

1952.12.211953.10.31

유 철

총경

1953.10.311955.08.17

조동한

총경

1955.08.171957.03.21

이재현

총경

1957.03.211957.07.10

박주현

총경

1957.07.101958.01.23

한천수

총경

1958.01.231958.10.20

이재현

총경

1958.10.201959.10.12

전병철

총경

1959.10.021960.05.14

이택현

총경

1960.05.301960.02.06

문익환

총경

1961.02.061961.06.25

정인주

총경

1961.09.261962.12.19

홍남식

총경

1962.12.201965.11.09

최기근(崔璣根)

총경(3437)

1965.11.091966.03.16

라종호

총경

1966.03.161966.07.09

홍성익

총경

1966.07.091967.10.28

이규헌(李圭鉉)

총경(4041)

1967.10.281968.12.16

김경섭(金經燮)

총경(5354)

1968.12.161970.03.05

박동언

총경(4043)

1970.03.051970.07.20

유명두

총경

1970.07.201972.10.24

권오명

총경(4446)

1972.10.241973.06.27

이은구

총경

1973.06.281974.12.13

이재성

총경

1974.12.131976.04.10

강우진

총경

1976.04.101977.04.13

권중방

총경

1977.04.131979.02.19

김희수

총경

1979.02.201980.07.16

박두일

총경

1980.07.221981.06.22

최기환

총경

1981.06.221983.06.30

이종윤

총경

1983.06.301985.09.02

백태현

총경

1985.09.021987.01.15

권정환

총경

1987.01.151988.06.03

김용진

총경

1988.06.031989.09.02

권승흡

총경

1989.09.031991.01.02

김서영

총경

1991.01.031992.04.13

김동길

총경

1992.04.131993.03.26

남덕진

총경

1993.03.261994.06.02

여창영

총경

1994.06.031995.07.12

최견집

총경

1995.07.121996.07.08

송강호

총경

1996.07.081998.03.24

김순태

총경

1998.03.241999.03.02

김윤환

총경

1999.03.021999.12.31

박병열

총경

2000.01.042001.01.11

이태선

총경

2001.01.112002.01.14

김성배

총경

2002.01.142003.04.08

양욱석

총경

2003.04.082003.07.16

임창수

총경

2003.07.162005.02.03

송성호

총경

2005.02.032005.10.06

장향진

총경

2005.10.072006.07.14

이성억

총경

2006.07.142007.07.02

김영두

총경

2007.07.042008.07.04

유욱종

총경

2008.07.152009.03.23

서범규

총경

2009.03.232010.07.02

김국희

총경

2010.07.032011.07.04

변관수

총경

2011.07.052013.04.18

박희룡

총경

2013.04.192014.01.20

우철문

총경

2014.01.21000000000

이창록

총경

상주경찰서 자료(http://www.gbpolice.go.kr/sangju/index.action)


. 경찰기구의 변천

1. 구한말 시기

1894(고종31)

내부대신이 총괄하며, 한성부에 경무청(경무사)를 두고, 각도에는 관찰사, 그 밑에는 각 수령이 수행하였다.

1900(광무 4)

경부대신이 총괄하고, 한성부에는 판윤, 각도에는 관찰사, 그 밑에는 각 수령이 수행하였다.

19025(광무 69)

내부대신이 총괄하고 그 밑에 경무청(경무사), 한성부에는 판윤, 각도에는 관찰사, 그 밑에는 각 수령이 수행하였다.

1905(광무 9)

내부대신(협판)이 총괄하고 한성부에는 경무청(경무사), 각 도에는 관찰사, 그 밑에는 각 수령이 수행하였다.

1907(융희원년)

내부대신(협판)이 총괄하고, 서울, 경기에는 경시청, 각도에는 관찰사, 그 밑에는 경찰서, 분파소에서 수행하였다.

 

2. 일제강점기

1910(융희4)

헌병경찰제를 도입하여 통감부에서 총괄, 그 밑에 경무총감부(경무총장), 경성에는 경찰서 그 밑에는 순사주재소와 파출소, 각도에는 경무부(헌병대장)를 두고, 시군에 헌병분서와 분견대를 두고 그 밑에 헌병출장소와 파견대, 경찰서와 경찰분서 밑에 경찰주둔소와 파출소를 두었다.


통감부 기구표

 

1919

문화경찰 제도를 도입하면서 총독부에서 총괄하고 그 밑에 경무국, 경성부와 각도, 그 밑에 경찰서를 두고 순사 파출소와 주재소를 두었다.

1930

총독부에서 총괄 그 밑에 경무국, 각도지사, 경찰부, 경찰서 그 밑에 순사주재소와 파출소를 두었다.

 

3. 미군정 시기

1945(1021)

광복이후 미군정청에서는 경무국이 총괄하고, 군정청경무국도지사경찰부경찰서지서, 파출소, 출장소 체계를 두었다.

1946

경무부에서 총괄하고 서울, 전주, 대구는 경찰총감부에서 각 도에서는 관구경찰청을 두고 그 밑에 감찰서(감찰관)경찰서(경감)지서, 파출소, 출장소 체계를 두었다.

 

4. 치안국 시기

19481124

내무부장관차관지방국, 치안국, 건설국을 두었다.

 

 

. 경찰의 직급 변화

경찰의 계급 제도는 1905년에는 을사늑약 이후 에는 경무사, 경무관, 총순, 권임, 순사 등으로 사용하였고, 1907년 이후에는 경시총감, 경시경부, 감독순사, 순사 등으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경무부장, 도경찰부장, 경시, 경부, 경부보, 순사부장, 순사로 개칠되고, 1946년에는 경무부장, 경무부차장, 도경찰부차장, 총경, 감찰관, 경감, 경위, 경사, 순경으로 개칭되어 사용되다가 1991년에 와서는 현재의 체제인 경찰청장, 치안정감, 치안감, 총경, 경정, 경감, 경위, 경사, 경장, 순경, 의경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연도별 명칭 개칭 현황은 다음 표와 같다.

1945.10.21

1946.1.16

1946.4.11

1946.9.17

1949.1.7

1950.7.27

순사

순경

순경

순경

순경

순경

 

 

 

 

 

 

순사부장

경사

경사

경사

경사

경사

경부보

경위

경위

경위

경위

경위

경부

경감

경감

경감

경감

경감

경시

감찰관

감찰관

감찰관

 

 

 

총경

총경

총경

총경

총경

도경찰부장

도경찰부

차장

(관구)

경찰부청장

(관구)

경찰부청장

경무관

경무관

 

 

(관구)

경찰청장

(관구)

경찰청장

 

 

 

 

 

경무총감

 

 

 

경무부차장

경무부차장

경무부차장

 

치안부국장

경무부장

(장관)

경무부장

(장관)

경무부장

(장관)

치안국장

(치안이사관)

치안국장

(치안이사관)

치안국장

(치안이사관)

1966

1969.1.7

1974.8.22

1980.9

1983

1991.7.31 이후

 

 

 

 

의경

의경

순경

순경

순경

순경

순경

순경

 

경장

경장

경장

경장

경장

경사

경사

경사

경사

경사

경사

경위

경위

경위

경위

경위

경위

경감

경감

경감

경감

경감

경감

 

경정

경정

경정

경정

경정

총경

총경

총경

총경

총경

총경

경무관

경무관

경무관

경무관

경무관

경무관

 

치안감

치안감

치안감

치안감

치안감

치안감

 

 

치안정감

치안정감

치안정감

치안국장

(치안이사관)

치안국장

(치안이사관)

치안본부장

(차관급)

치안본부장

(치안총감/차관급)

치안본부장

(치안총감/차관급)

경찰청장

(차관급)


 

 

. 상주 경찰인력 변화

상주경찰의 정원에 관한 통계에 관한 자료에 관하여 공개된 자료가 빈약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원인은 일제강점기 경찰 업무는 군사 조직인 헌병과 업무를 공유하면서 기밀업무를 취급하였기 때문에 정원과 업무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일제 강점기의 공개된 일부 자료를 보면 1924년에는 96, 1928년에는 80, 1937년에는 83명으로 점차 경찰 인력이 증가됨을 볼 수 있다.

 

구분

警察

警部

警部補

巡査部長

巡査

駐在所數

1924

朝鮮人

1

2

9

40

52

17

日本人

1

-

1

42

44

小計

2

2

10

82

96

1928

朝鮮人

1

2

-

40

43

16

日本人

-

1

-

36

37

小計

1

3

-

76

80

1937

1

3

17

62

83

16

출처 : 경상북도상주군세일반(1924), 경상북도통계연보(1930), 군세일반(상주군, 1937)

광복 이후의 자료는 확보할 수가 없어 그 수는 알 수 없으며, 1967년에는 276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볼 때 매년 증원이 있어 왔는 것으로 보인다. 상주경찰의 정원에 관한 통계 관리는 1994년까지는 상주시.군에서 관리하였으나 1995년부터는 경찰공무원의 정원에 관한사항은 경찰청에서 통계를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시군 통계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경북지방경찰청에서는 경북내 전체의 각시군 경찰 통합정원만 공개되어 있어 상주경찰의 정원 자료는 알 수가 없다.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276

275

284

282

289

207

208

209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207

200

207

-

203

246

244

247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238

238

224

228

229

229

229

229

1991

1992

1993

1994

 

 

 

 

229

231

254

282

 

 

 

 

 

19701975년까지는 경찰과 소방공무원이 합쳐진 정원이고, 1983년부터는 소방공무원이 상주군의 통계로 집계되었다. 1995년 이후의 통계는 상주시군에서 통계관리를 하지 않고 경찰청에서 별도 통계 관리를 하기 때문에 상주경찰의 정원을 알 수 없다. 2012년 통계청자료에는 정원이 230명이고, 본서에 101, 지구대와 파출소에 129명이다.

통계자료를 19671969년까지는 본서와 각 지서별로 집계를 하였는데, 면의 지서에는 414명이고, 본서에는 190명 이상이 근무하였다.

구 분

합계

상주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1967

277

197

4

4

4

5

5

1968

275

191

4

4

5

5

5

1969

284

198

5

4

5

5

5

구 분

외남

내서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1967

4

5

4

5

4

5

5

1968

4

5

5

5

5

5

9

1969

5

5

5

5

5

5

9

구 분

외서

은척

공검

함창

이안

 

 

1967

5

4

2

14

3

 

 

1968

5

4

4

5

5

 

 

1969

5

4

4

6

4

 

 

 

 

. 순직 경찰 선양 시설

경찰이 순직하여 그 공적을 귀감이 되도록 주민 등이 비를 세워 칭송하는 예는 드물다. 이는 경찰 제도가 근대에 만들어진 제도이고, 조선시대와 같이 봉건사회에서는 남의 치적을 선양하는 것이 큰 미덕이었고, 치적을 선양하는 사람과 선양을 받는 사람 모두가 사회의 귀감 대상이었으나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미덕이 아니라 유교사회의 불필요한 잔재물이라고 할 정도로 주민의 의식 변화를 가져 왔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공동체 사회 보다는 자본사회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타인의 비를 세워 공적을 선양하는 미덕은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따라 상주군에서는 1965년 남산 충혼탑에는 전몰자 및 순직자(殉職者) 289명과 전상자(戰傷者)공상자(公傷資) 등 총 1,594명 영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참배를 하고 있다. 충혼탑에 배향되어 있는 분은 다음과 같다.

구 분

배향인(전사, 순직일)

1946

김교원(10.3), 박용식(10.3)

1948

박세명(5.25), 곽만재(6.1)

1949

이정호(9.16), 박희덕(10.26), 전영란(11.18)

1950

염병술(9.3), 김실경(12.15), 권상우(12.28)

1951

허찬호(1.2), 최도영(7.15), 배윤직이필모(9. 8)

그러나 이러한 미덕은 잊히지 않는 큰 전화를 겪으면서 나타나게 되는데 경찰 순직비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경찰의 순직비가 낙동강 전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연전을 펼친 화령장 전투의 순직 경찰에서 볼 수 있다.

상주에서는 화서면 신봉리 화령장지구 전적비우측에 경찰 순직비가 2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순직비는 19501012일 상곡리에서 전사한 황을흠 총경의 황을흠총경순직비(黃乙欽總警殉職碑)’1950103일 금산리 전투에서 전사한 김용환 경위의 김용환경위순직비(金容煥警衛殉職碑)’가 문화재자료 제126호인 신봉리 석조보살입장좌측에 세워져 있다.

 

. 맺음말

우리나라는 반도형의 국토로서 대륙에서 해양, 해양에서 대륙으로 상륙하는 길목으로서 역사상 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역사기록으로는 90여회의 외침이지만 왜구, 거란, 여진의 침략까지 포함하면 1천 번이 넘는 침략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많은 침략이 있었음에도 우리의 역사까지는 침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10829일 한일 합방 조약을 맺은 후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기면서 1945815일까지 36년 동안은 우리의 역사까지 빼앗기고 정신문화까지 왜색화(倭色化) 되면서 오늘날까지 그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당시 한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일제강점기 경찰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찰은 일본인이 주요 요직을 맡아왔지만 한국인 경찰도 함께 치안 업무를 담당해왔다. 따라서 해방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경찰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경찰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하기 싫고 아픈 역사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난 역사는 인정을 하여야 한다.

아픈 역사 속에서 경찰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정착되었고 그 당시에는 경찰과 헌병 행정은 기밀 업무이면서 국민이 보는 시각과 느끼는 것은 치외법권(治外法權)의 한 분야였다. 또한 전쟁과 혼란한 시기에 지방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행정이 치안 분야였으며, 어느 행정 조직보다 사람의 신체적인 구속이 따르는 업무로서 기록 자료가 있어야만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분야이나 경찰행정 자료는 찾기가 어렵고 남아 있는 자료도 적다. 이러한 원인은 해방이후 일본인 경찰이 철수하면서 고의적 문서 파기와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인 경찰이 보복의 우려로 인해 고의적 문서 파기 등이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경찰행정 이외에 내무행정과 향토지를 토대로 당시의 폐쇄된 자료를 추출하였기 때문에 내용이 소략하고 빈약하다. 일제강점기 경찰행정 자료가 발굴되면 새로운 연구가 되어야 될 부분으로서 경찰 자료 소장자의 적극적인 자료 공개가 절실히 요구된다.

 

 

<참고문헌>

1. 경상북도상주군세일반, 1924.

2.경상북도통계연보, 1930.

3.군세일반, 상주군, 1937.

4.상주대관(향토지), 상주경제자립연구회, 현대출판사, 1957.

5.朝鮮駐箚軍歷史, 日韓外交資料集成, 金正明編, 巖南堂, 1967.

6.韓國警察史, 5, 警察廳 歷史編纂委員會 編著, 2006.

7.朝鮮時代歷史民族誌(慶北尙州植民地經驗), 板垣龍太著.株式會社明夕書店, 2008.

8.상주시사(5), 상주시사편찬위원회, 2010.

9. 신현기,경찰인사관리론, 파주: 법문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