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6호(2016년)

상주학. 상주문화 26호. 상주 남천의 수제시설(水制施設)

빛마당 2017. 2. 2. 21:22

상주 남천의 수제시설(水制施設)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시청 문화융성담당
金  相  鎬

Ⅰ. 머리말
  강이나 바다에서는 물의 흐름으로 기슭이나 바닥의 바위나 토사가 씻겨 패어지는 세굴(洗掘) 현상이 발생한다. 세굴은 하천 바닥을 쓸고 가는 물의 힘이 한계 소류력 한계 소류력(限界掃流力) 이동 바닥 개수로 속의 흐름에 의해서 저질이 이동하기 시작할 때의 소류력. 즉 모래와 자갈을 압류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소류력을 말한다. 주로 저질의 밀도, 입자의 크기와 상태, 입도 분포 또는 유수의 밀도가 이에 관계한다.(토목 용어사전)
 이상이 되면 하천의 흙들이 아래로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림  수제 종류(토목용어사전)
  이러한 세굴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중에 설치되는 시설(교량, 보 등)은 빠른 유속에 의해 기초부분 주변의 토사가 세굴되어 구조물이 쓰러지기 쉬운 곳에 돌망태, 사석 등으로 호안(護岸)·수제(水制)·바닥굳히기와 같은 공사를 해 시설의 기초부분 주변을 세굴로부터 보호한다.
  수제(水制)란 하안 또는 제방보호 뿐만 아니라 흐름방향과 유속을 제어하여 하안 또는 제방을 유수에 의

한 침식작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호안 또는 하안 전면부에 설치하는 구조물로서 침식작용 방지를 위한 공작물이다. 수제에는 수제 속을 물이 흘러 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투과 수제와 수제를 월류(越流)시키는 불투과 수제가 있다.

그림 수제 종류(토목용어사전)


이러한 수제 시설은 지금은 하천 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공법이나 일제강점기 때에도 성행되어 왔던 제방 보호 공작물이었다.

수제시설은 어느 시기부터 사용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까지 하천의 제방 보호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토목 자재와 장비의 발달로 지금은 없어진 수리시설이다. 본고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발굴조사 된 수제시설 사례를 살펴보고 2016222~223일까지 남천 제방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호안 석축시설에 대하여 발굴기관에서는 일제강점기와 조선시기에 축조된 제방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필자는 제방의 호안석과 수제시설로 보고 수제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바탕으로 이 유적의 조성 용도와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수제(水制)의 종류(種類)와 용어(用語)의 정의(定義)
  수제(水制, spur dike, groin)는 수세를 완화하거나 하신을 정정하기 위하여 하안 河岸, ‘강기슭’으로서 하천 양쪽의 둔덕을 말한다.
으로 부터 하신 河身, 강줄기의 물이 흐르는 부분
으로 향하여 설치한 공작물이다.


그림  수제의 명칭


그림 수제의 명칭


    
  투수의 정도에 따라 불투수성, 반투수성, 투수성으로 구분되고, 시공재료에 따라 영구적, 반영구적 또는 일시적인 것, 설치 방향에 의해 물 흐름 방향에 직각인 횡수제와 평행한 평행 수제 등으로 분류도 한다. 그러나 사용하는 수재 재질에 의해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제의 종류와 각부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토목용어사전(하), 대한토목학회, 1996, 한국수자원학회(하천공사표준시방서, 2007.12.)에서는 말뚝수제, 콘크리트불록 수제, 침상수제(섶침상주제, 말뚝상치수제,목공침상수제,콘크리트방틀수제), 날개형수제로 구분하기도 한다.


 ① 말뚝수제(-水制, pile dyke) : 투과수제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나무 혹은 철근콘크리트 말뚝을 2열 이상 박아 놓은 수제로서 완류하천에서 많이 사용된다.
 ② 밑다짐수제(-水制, foot protection dyke) : 호안 앞면의 하상의 세굴을 방지하여 흐름을 하천의 중심부로 유도하기 위하여 설치한다.
 ③ 섶침상수제(-沈床水制, fascine mattress dyke) : 수심이 얕은 곳의 웨어(weir)나 바닥다짐의 물방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섶을 깔아 수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④ 이외에도 재료 및 형태에 따라 뼈대 수제, 콘크리트 블록 수제, 날개 수제, 타이어 수제, 철제 수제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 수제에 관련한 용어를 보면 수제구역(水制區域, groin field)은 인접한 수제간의 구역을 말하며, 수제의 앞부분을 수제머리(水制-, groin head)라고 한다. 강턱에서 흐름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건설된 하천 내 구조물을 돌출수제공(突出水制工, bankhead)이라 한다.
  또한, 수제의 설치 각도에 따라 상향수제, 직각수제, 하향수제로 나누어지고 설치 각도를  α 〉90°를 상향수제, α=90°를 직각수제, α〈90°를 하향수제라 정의하기도 하였다.


                                                                                 그림3  수제 설치에 따른 구분


  구조상으로는 투과수제와 불투과 수제로 나누어진다. 투과 수제에 사용되는 재료는 원형관, 수목, 콘크리트 블록 등이 있다. 손교창,「수치모형을 이용한 불투과성 수제 설계기법 연구」,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 5~6쪽.




                                                                               그림4  구조상의 구분


  수제의 역할과 형태에 따라 평행수제와 돌출수제로 구분되며, 평행수제는 수로를 직선화하기 위해서 하천흐름과 평행으로 설치되며, 하천 사행부의 출구 좌우안의 보호를 위한 것이다. 손교창, 위의 논문, 7~8쪽.



                                                                                   그림5  돌출수제



                                                                                   그림6 평행수제

 
  일본의 수제에 관한 정의를 보면 수제공(水制工)을 횡공(橫工, Cross dyke)과 평행공(평행공, Parallel)으로 나누고, 구조와 양식에서는 투과수제(透過水制, Permeable), 불투과수제(不透過水制, Impermeable)로 구분된다. 설치 방향에 따라서는 직각수제(直角水制, Normal groin), 상향수제(上向水制, Inclined groin), 하향수제(下向水制, Declined groin)로 구분된다. 이외에 수제의 형상에 따라 曲がり出し, 丁出し, かま出し, かざ出し으로 분류하고 있다. 最新河川工學, 宮田公平, 理工圖書株式會社, 1993,165~167쪽


. 국내의 수제 시설

국내에서는 하천 제방에 수제가 언제부터 적용되었는가는 현재까지 발굴 유적이 없어 그 시기를 가름하기 어렵다. 다만 일제 강점기의 자료에 의해 수제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수제는 한자어로 水制이고 한글로는 물지릅으로 불렸다. 이와 같은 한글 표기는 1927(소화2) 11월 충청북도에서 하천사용을 주의시키는 전단에 보면 수제는 한자로 水制라 하고 한글로 물지릅이라 덧말로 표기한 것을 보면 수제물지릅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하천 사용주의 안내서


일제강점기에는 하천에 수제를 설치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기록은 1928~1935년까지 나타난다. 설치 위치는 압록강과 삼교천, 청천강이다. 191819일 신설 허가한 압록강 수제는 洗樹水制, 延長 502箇所로서 종류와 길이 개소수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나머지 수제 허가는 수제의 종류와 길이 등 구체적인 제원 없이 개수만 나타난다.

 

許可

河川名

位 置

水 制

告示日

1928.1.9

鴨綠江

平安北道 龍川郡 楊西面 新城洞

洗樹水制, 延長 502箇所, 拾石護岸 1002箇所

309

1928.1.13

1929.5.21

三橋川

平安北道 義州郡 古律面 龍下洞

水制3

736

1929.6.17

1930.2.4

三橋川

平安北道 義州郡 古律面 龍下洞, 陽光面 山斗洞

水制7

930

1930.2.10

1930.9.6

三橋川

平安北道 義州郡 光城面 正心洞

水制3

1109

1930.9.11

1931.6.16

鴨綠江

平安北道 龍川郡 楊西面 龍淵洞

水制2

1332

1931.6.16

1931.10.8

鴨綠江

平安北道 龍川郡 藪 島面 東洲洞

水制4, 護岸 120, 堤防石垣220

1432

1931.10.13

1935.8.21

淸川江

平安南道 安州郡 安州邑 金城里

水制4

2587

1935.8.26

 

이러한 수제 신설 허가를 한 하천의 위치를 볼 때 설치한 하천은 서해 바다에 접해있고, 하천의 폭이 넒은 곳에 설치된 수제이다. 이외의 수제의 설치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지역에서는 하천에 수제를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의 자료는 1930년 언론에도 보도되어 수제의 실황(實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압록강 연안에 설치된 수제가 항로에 방해가 되어 철거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다. 이러한 보도내용으로 볼 때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수제가 설치된 곳이 여러 곳에 있었고 신규로도 설치되었던 시기라고 하겠다.

평북 용천군 양서면 견일동 동태평은 압록 연안에 있는데 조수의 급류로 인해 제방이 붕락할 운명에 있어 수제공사를 하였는데 이것이 항로에 방해가 된다하여 철거해야 한다는 진정이 있었다.

그러나 1934년 대홍수로 인한 재해복구를 위하여 상주군 이안면지내 제방재해복구공사 실시계획서등의 자료에서 대구 신천의 수해복구공사에 수제의 크기와 위치가 표기된 공사계획도가 있다. 이 계획도는 1937(소화 12)~1938(소화 13)에 복구하는 계획인데 수제의 규모를 보면 길이 3~12m, 2~10m로서 4종의 수제가 설계되어 있다. 이 공사계획도와 같이 실제 수제가 설치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림 대구신천 재해복구 공사 계획도(1934)


또한 상주에 수제가 설치된 곳은 1932년 북천에 설치된 경북선 철교 아래쪽에 설치된 수제와 1935년 남천에 설치된 수제시설이 설계도면에 의해 확인된다.

북천 제방에는 길이 5.0m, 2.0m 크기의 수제 7개가 설치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냉림동 83-1번지 일대로서 철교의 교각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남천 제방에는 길이 15m, 4.5~3m 크기의 수제 2개가 설치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화개동 317-2번지 일대로서 지금은 직선형 하천이나 그 당시에는 굴곡이 큰 위치이다. 남천제방에 설치된 수제는 다음 그림과 같다.


그림 남천제방 수제(평면)

그림 남천제방 수제(단면)



이러한 국내 수제시설의 자료가 일제강점기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그 이전의 시기에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하천의 수제시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하천 수제공법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설치된 시설물일 가능성도 크다.


. 상주 남천의 수제시설 현상

상주에서 수제가 발견된 곳은 상주 공성면 웅이산에서 발원하여 상주 시가지 남쪽으로 동류(東流)하는 남천의 제방이다. 발견된 원인은 상주읍성 성벽의 석축 시설이 남천 제방 축조에 사용되었다는 주민의 제보에 의해 상주 병성천 고향의 강 정비사업구간내 호안석 일부에 대한 문화재 발굴(표본)조사를 하면서 발견되었다. 표본조사 결과 읍성 성벽의 석축 자재로서의 치석 흔적이나 성돌로서 특성이 있는 한쪽 면()이 치석되고 뒷길이가 있는 석재는 없고, 치석 흔적이 없는 대형 자연석 석재를 쐐기를 이용해 절단한 석재들이 소수로 섞여 있는 상황으로서 상주읍성에 사용되었던 성벽의 석축 자재로 확정하기는 어려운 유적이었다.

조사의 범위는 석축 호안이 잔존하고 있는 제방 약 250m정도로서 50m 간격으로 수제가 설치되어 있는데 수제가 설치된 곳을 포함하여 3곳을 조사하였다. 결과는 상단부에는 석재의 크기가 작고 하단부로 내려가면서 커지며, 상단부에는 자연석을 쐐기()으로 절단한 흔적이 있는 작은 량의 호안석이 자연석에 섞여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축조 방법을 보면 상단부에는 깬 자연석 1~2, 하단부에는 가공되지 않은 큰 자연석을 2~3단 쌓기를 하였으며, 끝단부는 큰 자연석으로 1단 쌓기 한곳도 있다. 이 끝단부에 접해 돌출된 수제를 설치하였는데 호박돌 정도의 자연석을 4~5단 쌓고 내부에는 사질토로 채웠다. 문화재 표본조사결과 노출된 석축시설을 바탕으로 모식도를 작성해 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그림 모식도(1)

그림 모식도(2)


이 유적에 대하여 발굴기관에서는 호안석 하부를 큰 자연석을 쌓은 부분을 1차 제방, 그 상부 입자가 작은 깬 자연석을 쌓은 부분을 2차 제방으로 명명하고 각 단계의 제방은 서로 그 시기를 달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방 축조시기를 최소 일제강점기 또는 그 보다 앞선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1차 제방과 2차 제방이 시기를 달리한다면 1차 제방은 최소 조선시대 어느 시기에 축조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림 사제   (1)   그림 호안석


그림 사제(2)



. 지형도에 의한 수제 축조연대 추정

근대 상주에서 가장 큰 지형적 변화가 있었던 것은 1934년 갑술년 대홍수 때 이었다. 이때는 대부분의 제방이 유실되고 낙동강 연안 지역에서는 낙동강의 범람으로 침수와 취락지가 유실되면서 조선시대의 자연지형이 변화되는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기계화 시공이 불가능하여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수해복구를 하였기 때문에 큰 웅덩이나 모래섬이 형성된 지역은 복구를 하기 보다는 자연지형으로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종전 농경지나 취락지가 저수지 또는 황무지로 변화되어 지형이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근대 토목장비의 발달로 인한 대규모의 경지정리와 제방의 축조로 옛 지형을 가름하기 어렵다.

상주에서 갑술년 대홍수 이전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는 1914년 측량 지형도, 1917년 지형도이다. 대홍수 이후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는 1956년의 지형도, 1959년 지형도이다.



그림 1914년 측량 지형도


그림 1917년 측량 지형도


대홍수 이전인 1914년 지형도에서 옛 남천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수제시설이 발견된 지점을 포함한 남천의 제방 설치 흔적이 없으며, 수제 시설 위치에는 하천과 수로가 형성되어 있고, 현재의 하천과 같은 직선형이 아니고 ‘S’자 형 굴곡부로 형성되어 있다.

수제시설이 발견된 곳에는 물줄기가 직선이고 하상 폭이 좁아져 유속이 빠른 지점이며, 바로 아래쪽은 굴곡부로서 세굴이 큰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작지인 논()은 제방이 없이 하천에 바로 접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7년 지형도는 1:10,000 축척 지도로서 19141:50,000 축적 지도보다 지형이 상세하다. 수제시설 발견지점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남천 북동쪽이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는 하천과 농경지 경계부분이 현재 지적도에 표기된 이동 경계지점과 일치한다. 이 지도로 유추해보면 남천에는 제방이 축조되지 않았고 황무지로 하천과 농경지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수림대가 형성된 지역이 자연적인 제방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수제 발견지점에도 제방이 설치되지 않았음이 확실해 진다.

대홍수 이후인 1956년과 1959년 지도에는 하천이 현재와 같이 직선화되어 있고 제방이 설치되어 있다. 다만 물줄기의 표기가 1956년 지형도에는 가늘고, 1959년 지형도에는 굵고 넓으며 본류(本流) 외에 지류까지 형성되어 있어 1956년과 1959년 사이에도 홍수로 인해 물줄기의 방향이 바뀐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제 발견 지점에 대한 지형의 변화는 1956년 보다 1959년에 물줄기가 하천의 가장자리에서 중심부 쪽으로 이동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림18.1956년 지형도   

그림19. 1959년 지형도   


1914, 1917년의 지도와 1956, 1959년의 지도를 비교해 볼 때 1914~1917년에는 남천과 수제 발견 지점에는 제방이 없었고, 1956~1959년에는 제방이 설치되어 있다. 즉 지도상으로 볼 때 이 지점의 제방은 1917년 이후 1956년 이전의 39년 사이에 축조된 제방이라 하겠다. 따라서 금번 발견된 수제시설은 1934년 갑술년 대홍수 이후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신설된 수제로 보인다.

한편 1914년 지형도와 지적도를 비교해 보면 그 당시의 지형을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해 볼 수 있다. 1914년 지형도의 ‘S’자 형 굴곡부가 지적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적도 제작 당시 이동(里洞)의 경계는 도로, 하천, 산의 정상부를 기준하였다. 남천의 경우에는 하천의 중심이 기준이 되었다. 하천의 제외지 하상에도 옛 전답의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제방 축조 전 하천의 형상을 가름해 볼 수 있다. 지적도와 같이 하천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수제 시설이 발견된 지점은 하천의 중심으로서 제방과 호안 시설이 있을 수 없는 위치가 된다. 따라서 수제시설의 설치 년도는 지적도 제작이후 즉 1914년 이후 축조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그림 20. 남천 변천 연혁도



수제 발견지점의 이동 경계를 보면 신봉동, 흥각동, 인평동의 3개동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고 제외지를 포함한 제내지까지 흥각동과 인평동의 경계가 된다. 이러한 이동 경계는 흥각동 지적도 제작 이후 하천의 수계가 바뀌어 흥각동과 인평동이 남천으로 분리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홍수 이전의 남천의 경계는 현재의 신봉동과 흥각동, 인평동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이 일대에서는 남천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하천의 폭은 좁아지고 경지의 면적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도심이 확장되고 농경지가 늘어나면서 자연적으로 하천의 폭이 좁아지는 현상은 상주 시가지 북쪽에 위치한 북천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이 지적도에 의한 지형 검토에서도 수제가 발견된 지점은 하천의 중심부로서 호안석과 수제를 설치할 위치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남천 제방의 축조 사실에 대하여 흥각동에 거주하는 동민은 제방을 축조할 때 흥각동, 오대동 소하천과 주변에 있던 자연석을 채집하여 남천 제방 공사장까지 레일을 깔고 궤도(軌道)를 설치한 후 광차(鑛車)를 이용해 호안석을 운반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은 제방이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었다는 확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 석재 가공방법에 의한 축조 시기 검토

남천 제방에 사용된 석재에는 자연석과 대형 자연석을 쪼개어 호안석으로 적당하게 만들어 사용되었다. 자연석을 절단한 흔적을 보면 다음 그림과 같이 쐐기형의 자국이 석재 한 점에 1~2개의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자국들은 산지에서 대형 자연석을 절단한 흔적이 아니고 단순히 일정 크기에 맞추기 위해 현장에서 절단한 흔적으로 보이며, 시기는 근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21 호안석 절단면 1,2


이와 같은 추정은 아래 그림과 같이 조선시기에 채석한 것으로 보이는 상주 만산동 소재 자산산성 내의 절단 흔적과 병성동 소재 병풍산성 내, 일본의 오사카성(1583년 축성)의 절단 흔적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기의 석재 절단은 계획된 방향으로 쐐기 구멍을 조밀하게 넣어 원하는 방향으로 절단을 유도한다. 이와 같은 절단 방법은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다만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절단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쐐기 구멍을 더욱 조밀하게 넣어 절단 방향을 유도하는 것이 다르다. 이와 같이 석재를 절단하는 방법은 지금도 석산(石山)에서 원석(原石)을 절단할 때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쐐기 구멍을 만드는데 구멍을 뚫는 것을 정에서 착암기로 장비만 변경하여 사용할 뿐이다.

이러한 석재 절단 방법으로 볼 때 남천 제방에 호안석으로 사용된 절단 석재들은 일제강점기나 그 이후에 절단된 석재들로 판단된다.



그림 23. 자산산성(1)

그림 24 장동리 고()우물

그림25. 병풍산

그림 26. 일본 오사카성


. 일본의 수제시설 발굴조사 사례

한국의 제방 유적 중에서 호안과 수제에 관한 발굴조사와 연구 사례가 적어 남천에서 발견된 수제를 비교할 수는 없는 여건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천 제방에 수제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수제 발굴 사례가 있는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본에서는 제방의 호안과 수제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러나 하천 유적 중에서 수제시설 유적은 드물게 나타나는데 석축을 이용한 수제 발굴현황은 다음과 같다. 발굴조사 결과 하천의 수제시설은 15세기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발굴 조사지별 유적의 대표적인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遺跡名

所在地

年代

水制間隔

石積堤との共存

信玄堤

山梨県

中世末近世初

30

萩原遺跡

和歌山県

1600前後

4070

宇治川太閤堤

京都府

文禄3(1594)

5080

村遺跡

高知県

江戸時代初

-

 

1) 우치천(宇治川) 태합제 유적(太閤堤遺蹟)

태합제(太閤堤)1594(文禄 3)에 복견성(伏見城)을 축성할 때 우치천(宇治川) 치수(治水) 때문에 쌓은 총연장 12의 제방이다. 이 일대에는 1993(坪城 5)부터 2007(坪城 19), 2008(坪城 20), 2009(坪城 21), 2011(坪城 23) 전체 8번의 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에서 200795宇治市歴史資料館에서 太閤堤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길이 75m, 5.5m이다. 이 제방에 수제가 5080간격으로 설치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림27. 발굴현황도

그림28. 太閤堤(1)

그림29. 太閤堤(2)


2) ()추원유적(萩原遺跡)

소재지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이토군(伊都郡) 가쓰라기정(かつらぎ)에 있다. 시대는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92~1333),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 에도시대(江戸時代, 1608

~1868)로서 발견된 유구는 鎌倉시대의 돌쌓기공과 호안(石積みの護岸), 室町시대의 돌쌓기 제방(石積堤防), 江戸시대의 논과 도로(水田, 道路)가 있다.



그림30. 萩原遺跡護岸施設槪略図


3) 신겐둑(信玄堤)

산리현(山梨県)에 위치한 제방으로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지시에 따라 축제(築堤)한 것이라 한다. 제방은 가마나시강(釜無川)에 비가 내리면 고후분지(甲府盆地) 중앙부에 있어 대부분의 주택과 전답이 떠내려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제방 구축이 필요했다. 이 제방은 1557(弘治 3) 완성되었으며, 당시의 규모는 350(650m) 정도라고 한다.



그림31. 貞享5(1688)段階信玄堤推定図


4) 우에노촌 유적(村遺跡)

우에노촌 유적에서는 토사번가로 · 노나카켄장(土佐藩家老野中兼山, 1615~63)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17세기 중반의 하천호안 유구(석축)가 발견되었다고 고지현매장문화재센터(高知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에서 2008925일 발표했다. 발굴 조사 중 주민이 중 제방(中堤防)’라고 부르는 흙더미를 발굴한 결과, 다이쇼, 쇼와초기(大正昭和初期)로 추정되는 길이 약 120m의 석축 제방과 제방 밑에서 17세기 중엽. 호안 유구가 발견됐다. 확인된 호안 유구는 약 250m, 전체길이는 2이상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4.3m, 3.5~9.5m이다. 또 전국적으로도 드물다고 하는 제방 모양의 유구(길이 약 41미터)도 발견되었는데 자연석을 사용하여 호안 유구와 병행하는 형태로 하천으로 내밀고 있다.

 

 

. 다른 나라의 수제시설 연구 사례

하천의 생태환경은 생태계의 유지와 자연재해를 억제하는 인공구조물로서 경제성을 중시하는 현대에서는 생략되는 하천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수제 설치를 하는지의 연구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금 상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향의 강 살리기 사업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천을 정비하고 있다고 하겠다.

 

1) 일본

수제설치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하천의 수리학적, 환경적인 개선효과를 동시에 고려한 설계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하폭이 넓은 하천에서 유수의 방향을 조절하여 하안의 침식방지와 재해로 파괴된 호안을 수제와 함께 복원하여 홍수방어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수제두부의 세굴을 이용하여 하천 환경의 보전 및 복원에 다양한 기능을 하는 구조물로 설명하고 있다.

코요시강((子吉川)의 사례에서는 설계 초부터 이차원 유황해석을 실시하여 설치 전·후의 흐름 상황을 공학적으로 예측하며 설계가 전개되었으며, 수제를 시공함에 있어서도 주변의 환경을 고려하여 대형 크레인을 이용하였다.



그림32. 이차원 유황해석(일본 국토교통성, 2008)


2) 중국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수제를 이용해온 다양한 설치사례 분석 및 실내실험을 통해 수제설계 기술에 관한 이론이 잘 정립되어 있다. 특히 선박운행을 위한 수제 설치시 수제의 횡단면 경사, 수제 두부 설계 및 천단부의 폭, 수제와 호안의 연결부에 관한 설계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수제에 관한 연구결과 및 실험 자료들을 토대로 각 인자에 관한 그림 및 관계식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수제 설치 사례로 1975년 후아이강 6095m 구간에 투과수제 8기를 배치하여 수제와 수제 사이에 토사퇴적을 유도하였다.


그림33. 후아이강 수제 배치 개략도(중국 안휘성, 1975)


3) 미국

수제의 한 형태인 베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1980년대 초 미국 아이오와 대학 수리연구실(IIHR)에서 Odgaard에 의해 처음 연구가 시작되었다. 베인 설치사례는 니시나보트나강(Nishnabotna River)의 경우 베인 설치 후 약 50%의 하상 횡단경사가 감소되었으며, 제방 근처의 유속을 1020% 감소시켜 제방보호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 호주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는 수제설치를 위한 구체적인 현장조사 방법 및 각 인자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이한 점은 아래와 같이 부유물의 충격에너지를 고려한 수제안정성에 관한 추천 값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5) 유럽

네덜란드는 1980년대부터 치수목적의 수제가 발강(Waal)을 비롯한 다수 하천에 설치되었으며, 주운과 수상교통 등 이수목적의 하천 정비사업에도 수제공이 적용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델프트 기술대학(TU Delft)에서 하천 수제의 형태동역학을 발간하여 수제에 관한 전반적인 이론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스위스 쮜리히주 ‘Sihl에 홍수로 인한 피해방지를 위해 거석을 이용한 여러 개의 수제가 설치되었고 독일의 경우에는 다년간 축적된 수제관련 수리실험을 바탕으로 엘베강(Elbe)에 수제를 설치하여 지속적인 현장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다.

 

 

. 맺는말

한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의 수제시설 발굴조사와 운용 사례를 살펴보고 남천 제방에 시설된 수제의 설치시기를 살펴보았다.

남천제방에서 발견된 수제시설은 전면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표본조사 결과만으로 전체 유적에 대한 유추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규모와 제원의 파악에는 중점을 두지 못하였다. 규모는 육안으로 확인되는 호안 길이 250m 정도와 50m 간격으로 지상에 노출된 수제시설 확인과 1개소의 호안석과 수제시설이 연결되는 부분만 표본 조사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만 확실한 제원과 규모가 확인 될 수 있다.

발견된 곳은 하천 바닥으로서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유적의 발견이 쉽지 않고 석축 시설 만으로 시기를 추정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유적이다. 본고에서는 발견 수제 시설의 설치시기가 어느 시기에 조성하였는지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였다. 설치시기는 국내에서 수제시설 발굴조사 사례가 없고 이번 발견이 최초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시기의 설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본조사에 따라 노출된 수제시설로 관련 자료를 확인하고 지형도와 지적도, 석재 가공법 등을 검토한 결과 남천 수제 시설의 조성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914, 1917년 지형도에는 남천제방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1935년 남천제방인 화개동 일대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수제 2개를 설치한 사례가 있었다. 이때의 도면에는 수제 발견지점의 지형도는 없으나 화개동 일대에는 제방이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956, 1959년 지형도에는 남천제방이 축조된 것이 확인 된 것으로 볼 때 1935년 이후 1956년 사이에 축조된 제방으로 판단된다.

1914년 지형도와 지적도를 대조한 결과 남천 제방 축조 전 남천과 농경지의 경계가 확인되었고, 남천에는 제방이 축조되지 않았음이 더욱 확실해 졌으며, 수제 발견지점은 제외지의 하천의 중심으로서 수로가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제방과 호안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다.

호안석에 사용된 석제의 가공방법을 조선시기의 상주 관내의 석산인 천봉산의 자산과 병풍산 석재 채석 흔적을 비교하고, 일본의 오사카성의 석재 채g석 흔적을 비교한 결과 조선시기의 채석 흔적과는 다른 흔적으로서 수제 발견지점의 석재 가공 흔적은 현장에서 호안석의 크기를 균일하게 만들기 위해 자연석을 절단한 흔적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남천 제방에서 발견된 수제시설의 축조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가 발생되고 1935년 이후 남천제방을 축조하면서 함께 설치한 수제시설로 판단된다.

그러나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부 발견 유적으로서 축조시기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할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수제 시설이라 하더라도 현재 남아 있는 수제시설은 전무한 형편이다. 앞으로 정밀발굴조사의 기회가 있다면 수제의 제원과 설치 공법 등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되는 유적임은 분명하며, 추가조사에 따른 이차적(二次的) 문화층 유물 발견에 따라 그 시기가 일제강점기보다 상회(上廻)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근래 이상 기후로 하천은 가뭄으로 인한 건천화 현상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는 자연재해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한 하천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생태 파괴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제방의 안정성 유지와 유로를 제어할 뿐만 아니라 퇴적 및 세굴 등에 의한 하상고의 변화를 최적화할 수 있는 수제 설치와 지속적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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