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사랑방 97강
2016. 12. 8(금) 14:00
상주문화회관(4층)
상산(商山)을 빛낸 선비들
-상산 3노(商山三老)・상산 4호(商山四皓)를 중심으로-
발표자 : 곽 희 상
(상주문화원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목 차 Ⅰ. 들어 가면서
Ⅱ. 상산 4호(商山四皓)의 유래
Ⅲ. 상산을 빛낸 시대별 상산3노・상산4노 1. 고려시대 1) 상주 최초의 문관 : 2정1한(二鄭一韓) 2) 상원 4로(尙原四老) 2. 조선시대 1) 1400년대의 함창의 3문장가 2) 1500년대의 상산 4노가(商山四老家) 3) 관각3걸(館閣三傑) 4) 상산 3노(商山三老) 5) 임란 후 상산4호(商山四皓) 6) 낙강범월명첩(1622년)의 상산 4호 7) 영남문장 4대가(1650-1700년초) 8) 조선후기 상산3노 9) 19세기 초 영남의 4문장가
Ⅳ. 마무리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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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商山)을 빛낸 선비들
- 상산3 노(商山三老)・상산 4호(商山四皓)를 중심으로 -
Ⅰ. 들어 가면서
우리 고장을 ‘상산(商山)’이라 불러 온지도 대략 1,000년이 넘었으니 천년고도(千年古都)라 하겠다. 현 지명인 ‘상주(尙州)’ 또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이름을 얻었으니 1,257년의 역사가 있고, ‘상산(商山)’은 990년대에 별호(別號)로 이름을 얻어온 세월이 대략 1,02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을이 우리 상주다.
상주의 역사를 더욱 올려보면, 사벌면 삼덕리에 ‘이사골’ 또는 ‘이사금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사금(尼師今)’이란 단어는 신라 초기의 왕호로,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부터 제18대 실성왕 때까지 사용한 왕의 명칭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정식으로 왕(王)이라 명칭한 것은 제22대 지증 마립간 4년(504)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면서였다. 종전까지는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居西干・혁거세), 차차웅(次次雄・2대 남해왕),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으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사벌국의 어느 왕이 신라국과 마찬가지로 이사금왕이 아니던가? 추후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사금’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전해 내려옴은 신라와 같은 맥락이라고 가정 할 때, 상주의 역사는 경주와 시기를 같이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달리 풍부했던 자원과 순후한 민풍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기록이 체계화되기 전부터 이 땅에는 이미 왕국(王國)으로서 통치자 내지 어진 신료들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문화유산이나 유적 등이 모두 훼손되었으니 전해오는 시대로 분류되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시대에 따라 훌륭하고 걸출한 인물들 - 역사에서 손꼽는 국사적 인물을 비롯하여 당대에 향리에서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가업을 계승하고 민풍순화와 후진을 양성시킨 상산의 선비들이다. 선비의 고장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별칭으로 사용되어 온 상산3호(皓) 또는 상산4호(皓)로써 문헌에 기록된 선비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Ⅱ. 상산 4호(商山四皓)의 유래
상산 4호(商山四皓)의 유래는, 중국 전한(前韓, BC 206∼AD 9년) 시대의 고조[高祖, 유방(劉邦)때, 진(晋)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무도(無道)로 서적을 불사르고 유교인들을 땅에 묻어 죽였을 때 4인의 인물은 혼란을 피해 홍농 지방의 상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 이들은 나이가 들어 머리도 수염도 온통 새 하야므로 당시 사람들은 4호(四皓 : 호는 하얗다는 뜻)라고 부른 것이 효시이다.
즉, 산동지방의 상산(商山, 상령, 상안이라고도 함)에 은거한 덕망 높은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4선비를 말한다.
이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어 난초 이슬을 먹고 살면서 선비의 도를 지킨 덕망 높은 선비들로 칭송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한나라(전한・前韓, BC 206∼AD 9)를 건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세자 책봉에서 적장자(嫡長子) 영(盈) 대신에 척부인 소생의 여의(如意)를 가장 총애하면서 세자를 삼으려는 종통(宗統)을 무시하려 하자 분연히 하산하여 세자(영)의 스승이 되어 기강을 바로 잡고는 다시 상산으로 들어 갔으니, 이 들 상산 4호는 선비의 큰 덕목인 진퇴(進退)를 분명히 함으로써 크게 추앙을 받았던 선비들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상산(商山)지방은 상산4호가 살아 말 그대로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
상주의 별호(別號)를 상산(商山)으로 정한 것이 고려 성종 순화년간(990∼994년)이다. 상락(上洛), 타아(他阿)라고도 하나, 상산이란 별호는 고려 성종(재위 961∼997)이 상주를 중국의 상산지방에 비견하고는 별호까지 제정해 주셨으니 아마 이 무렵에도 상산에는 큰 선비들이 살아 바로 선비의 고장임을 일찍부터 밝혀 놓았다.
Ⅲ. 상산을 빛낸 시대별 상산 3노・상산 4노
1. 고려시대
1) 상주 최초의 문관 : 2정1한(二鄭一韓)
신라가 상주를 통치하였지만 상주를 통치한 실적 등 지방관으로서의 활동상황은 없다.
고려조에 들어서면서부터 선비보다는 목민관의 학술적인 업적에서 유학이 시작되었다. 상주는 고려조에 들어서도 신라시대에 이어 웅주(雄州)였다. 983년(성종 2)에는 전국 12목의 하나로 군사상에서도 영남도의 중요한 고을이었고, 995년(성종 14)에는 상주를 중심으로 영남도(嶺南道)로 칭하여 ‘영남(嶺南)’이라는 용어도 상주에서 탄생시켰다. 1018년(형종 9)에는 전국 8목 중의 하나로 정착되면서 7군・18현・2지부사를 관할하면서부터는 왕권 확립에 따라 상주도 전국적인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어 계수관(界首官)이 상주(常主)하던 목(牧)이었다. 1314년(충숙왕 원년)에는 경주의 ‘경(慶)’자와 상주의 ‘상(尙)’자를 따서 ‘경상도’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고을이다.
이 시기만 하여도 불교가 국교인지라 관원(官員)이나 승려가 아니면 관련 기록이 없었으므로 선비의 근본이라 일컫는 유학(儒學)과 관련되는 기록은 상주목민관에서 시작된다.
문헌상으로 고려조 이후로 상주 최초의 지방관은 998년(목종 원년)에 부임한 이주좌(李周佐, ?∼1040)이다.
이 이후로의 부임한 목민관들로서 상주의 문학 또는 교육의 진흥에 크게 힘쓴 분이 숙종조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김부일(金富佾, 1071∼1132)은 직한림원으로 송나라에 갔다가 중국 송(宋)의 철종에게 찬사를 받은 문재가 상주목사(숙종 조, 1096~1106)로 부임하였으니 이 시기에도 문학이 흥했으리라 예상되나 기록의 한계가 있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상주에서 ‘2정1한(二鄭一韓)’으로 칭송되는 관리가 있었다. 정극영(鄭克永. 1067~ 1127)・정항(鄭沆. 1080~1136)・한충(韓沖. ?~1129) 등 세 사람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숙종조. 1096~1106)으로 근무하면서 선정으로 칭송되었다.
① 정극영(鄭克永. 1067~1127)
〇 상주사록(尙州司祿) (재임 ? ∼ ?) (숙종 조)
〇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김포(金浦). 자는 사고(師古). 최유청(崔惟淸, 상주목사 1123∼1132)의 매부이다. 숙종 조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상주목의 사록(司錄)에 보임되었는데, 정치적 업적이 많아 정항(鄭沆)·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118년에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를 따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저술(著述)로 칭찬을 받았고, 이듬 해 돌아와서 국자제주 좌간의대부가 되었다. 1122년 한림학사가 되었고, 같은 해 인종이 즉위하자 예종실록 편수관을 지내고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이듬 해 이자겸의 참소로 남쪽 지방에 유배, 1126년 이자겸이 몰락한 뒤 소환되어 1127년(인종 5) 동경유수사가 되고, 이어 판위위사사 한림학사 지제고(判尉衛寺事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② 정 항(鄭 沆, 1080∼1136)
〇 상주사록(尙州司祿, 尙州牧掌書記) : 재임 ? ∼ ?) (숙종 조)
〇 고려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임(子臨). 호장(戶長)의 자손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섭대부경(攝大府卿)이 된 목(穆)의 세째 아들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祿)에 임명되었는데, 나이가 적으나 잘 판단하여 정극영(鄭克永)・한충(韓冲)과 더불어 사록(司祿)으로는 2정 1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예종 11년(1116)에 개경에 상경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가, 내시(內侍), 집주관(執奏官)이 되어 종묘제사를 담당하였으며, 집주관으로써 공평정직하다는 평을 받았다. 인종 때 이자겸이 집권하였으나 아부하지 않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1126년 이자겸이 몰락한 이듬해 ?시경?의 설명(說命)・주관편(周官篇)을 강의하고, 1129년 서적소(書籍所)에서 송조의 ?충의집(忠義集)?을 강독하였다.
1136년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원학사 승지(知樞密院事禮部尙書翰林學士承旨)로 승진되었으나 이튿날 죽었다.
사망하였을 때 저축한 것이 없어 인종에게 30년간 근시직(近侍職)에 있으면서 저축한 것이 없다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장례를 국비로 치루었다고 한다.
아들 정서(鄭敍)는 국문학으로 유명한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저자이기도 하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③ 한 충(韓 冲, ?∼1129)
〇 상주사록(尙州司錄) (재임 ?∼1111년 경) (숙종 조)
〇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주(湍州). 본래 단주(경기도 파주 일원)의 관리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었다가, 1111년 우보궐(右補闕)에 올라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1113년에는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거쳐 1121년에는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는데, 이때 최홍사(崔弘嗣)가 사사로이 군사를 동원하여 개국사(開國寺) 대장당(大藏堂)을 창건하려 하므로 이를 탄핵하다가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로 좌천되었다. 이듬 해, 대방공(帶方公) 보(俌)의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사촌형 한안인이 죽음을 당하자 외지에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패하자, 1127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니 백성들이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국자제주 한림시독학사(國子祭酒翰林侍讀學士)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이 돈독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적이 있었다고 한다.
2) 상원 4로(尙原四老)
고려 초에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국가의 기강이 서게 되었다. 왕권 강화책으로 먼저 최승로가 982년(성종 1)에 유교 사상이 중심이 되어 임금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수록된 ‘시무28조’를 비롯하여, 983년(성종 2)년에는 전국에 12목을 두면서 교육을 장려했다. 중앙에는 관학으로 국자감(992년, 성종 11)을 설치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전국의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다.
또한, 문종 7년인 1053년에는 최충(崔冲)이 개경에 9재학당을 세운 것이 사학(私學)의 시작이다. 이후로 11개의 사학이 더 설립되면서 12공도(公徒)가 생겨났다. 이 후에 라는 각 지방 사학에 치중하였다.
1127년(인종 5)에는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고,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시기에 상주향교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 지역에서 ‘상산 3노’ 또는 ‘상산 4노’라는 단어는 ‘상원 4로(尙原四老)’가 최초이다. 근원은, 상주 문학의 시사(詩社)활동으로서 가장 오래된 상주의 기문(記文)으로, 상산 김씨 김수자(金守雌, 1123∼1146)가 지은 《행학기(幸學記)》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국학의 학유(學諭)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손수 채소를 가꾸면서 아동을 가르쳤으니 기록상으로 상주에서 사학(私學)을 일으킨 최초의 선비이다.
고려 후기로 들어서는,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정중부의 난(1170년)을 피해 상주의 영현인 개령면 대곡(한골)에 우거(寓居)하면서 시(詩)를 남겼다. 서하는 당대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벼슬 운은 없었으나 시로 이름을 얻었다. 한국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적 작품인『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을 남겼다.
무신란으로 당시 우거한 사람이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로 상주문학에 끼친 영향은 특기할 만 하다. 최충헌의 난을 피해 개경에서 출발하여 1196년 6월 14일부터 9월 20일까지 상주에 머물면서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유상(遊賞)하는 등 상주에서 고시(古詩) 총 61수를 지었다. 그가 지은 ‘행과낙동강(行過洛東江)은 낙동강을 노래한 최초의 시이다.(필자 註)
1247년에 들어 동산수(東山叟) 최자(崔滋)가 1242년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3년 간 재임 기간 동안 상주 한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1212년에 문과에 급제 후 상주사록으로 부임하여 치적이 우수하자 중앙에서 발탁하였고, 1242년에는 목사가 되어 다시 부임하였다.
『상산지』에 소개된 행적을 보면, ‘천자(天資)가 순박하고 학문에 능통하였다. 강종(康宗) 때 등제하여 상주의 사록이 되어 군사(軍事)에 참여하고 서기를 관장하다가 뒤에 목사가 되니 진주의 김지대(金之垈)가 시(詩)를 지었다. 상주가 도내에서 으뜸가는 주로 옥송(獄訟)이 가장 많았는데 그가 부임하여 판결을 귀신같이 잘 알고 바르게 하니 이민(吏民)이 칭송하였다. 정월과 동짇달의 팔관회와 탄절(誕節)에 양 병사(兵使)와 제주(諸州)의 목사, 도호부사들이 하전(賀箋)을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이의 고하를 가려 발표할 때 매년 상주의 표전이 최상을 차지하메 모두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3년 뒤인 정미년(1247) 봄에, 명을 받들고 나아가 동남로(東南路)로 출진(出鎭)하고 상락(上洛, 상주)을 순력하였는데, 목사를 비롯하여 향교의 제생에 이르기까지 가시(歌詩)와 인계(引啓)를 바치는데 나란히 나와서 길을 꽉 메꾸었다. 나이가 일흔이나 여든 살 남짓한 네 노인이 ‘상원 4로(尙原四老)’라 칭하며 짧막한 인(引) 및 절구시(絶句詩) 네 수를 바치었다.(보한집)”고 한다. 일부를 소개하면,
전위람수후주번(前爲藍袖後朱幡) 전에는 남수(생원복)이다가 오늘은 주번(장군)이니
정최여공고미문(政最如公古未聞) 정치의 으뜸 공같은 이 옛적에도 드물었네.
초록원문호생자(草綠圓門虎生子) 풀 우거진 원문에 호랑이 새끼를 낳았다고
지금전작미담운(至今傳作美談云) 지금도 미담으로 전해진다네.
라 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불로정반백화개(不老亭畔百花開) 불노정 가에 온갖 꽃 피어난 것은
증시위주수자재(曾時爲州手自栽) 일찍이 주목(州牧)일 때 손수 가꾼 것일세.
거후춘광유적막(去後春光猶寂寞) 떠난 뒤 봄볕조차 오히려 쓸쓸해 하였더니
무정역희상군래(無情亦喜相君來) 백성들조차도 당신 오시는 걸 기뻐하는 구려.
동산수(東山叟)는 상주에 2번이나 부임하였다. 특히, 1242년부터 1244년까지 3년간 상주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이 고을을 다스렸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상주문학의 위상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무렵에 상산 4호풍(商山四皓風)이 처음 나온다. 이미 상주는 문화나 문학이 상류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주의 교육도 활성화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상산4호풍을 흠모한 선비가 자칭 ‘상원 4로(尙原四老)’라 하였으니, 그들의 의취(意趣)를 가히 짐작할 수 있고, 이는 곧 후대로 이어져 ‘상산 3로’나 ‘상산 4호’가 계속 탄생하게 되었다.
상주의 선비들의 시문학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였다. 그 일례로,
“원정(元正) 동지에 전국의 모든 목(牧)과 도호부(都護府)는 전례대로 글을 올려 상부(相府)를 하례(賀禮)할 때, 상주목은 진양후(晋陽侯)에게 4수(首)의 시(詩)를 올렸는데, 전국의 목(牧)과 부(府)에서 보낸 하장(賀狀)을 모아서 등차(等差)를 매기게 하였는데 번번이 상주목이 으뜸이었다(보한집, 券 中)” 라고 기록하였으니, 이 시기에 이미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상주 시문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겠다. 어찌 중국의 상산지방의 선비들과 견주지 아니하겠는가?
2. 조선시대
1) 1400년대의 함창의 3문장가
조선전기에도 상주의 한문학은 전국적 수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한국의 한문학사나 유학사에 오른 선비가 많았다. 이 시기는 특이하게도 상주보다는 오히려 함창지역에서 즉, 표연말, 홍귀달, 채수, 권민수, 권달수, 홍언충, 채소권 등이다. 이 가운데 세칭 절의파들로 일컫는 분들은 표연말, 홍귀달, 권달수, 홍언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그 중 대표되는 3문장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1431∼1498)
경남 함양인으로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자는 소유(小游), 남계는 호이다. 감찰 계(繼)의 3남으로 김종직의 문하생이며, 조위・김일손 등과 교유하였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알려 졌으며, 김굉필・정여창 등과 같이 문장에 뛰어 났다. 1472년 식년문과에 들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성종과 연산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아 무오사화(1498. 연산군 4)에 경원으로 유배 중 객사하였다. 또한 갑자사화(1504. 연산군 10)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후일 신원되어 함양의 남계서원과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남계집(藍溪集)』이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 시가 실렸다.
②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
함창의 양적리(羊積里)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부계(缶溪, 부림)이다. 자는 겸선(兼善), 허백정은 호이다. 5세에 이미 글을 지었고, 1459년에 진사, 1461년에 등과하여 좌참찬에 올랐으며, 1492년부터 1501까니 문형(文衡)으로 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평생을 실천유학으로 일관한 선비로서 연산군의 폭정에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갑자사화(1504)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대에 김종직·성현·조위 등과 4군자(君子)라 칭송되었으며, 유학과 사학(史學), 시문에 능하였다. 〈등루부(登樓賦)〉60운(韻)은 『황화집(皇華集)』에 올라 널리 회자되었고, 『동문선(東文選)』에도 시문 30여 편이 등재되어 있다.
③ 난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이다. 한양에서 태어 났으나 아버지[신보(申保)]가 함창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상주와 인연을 맺었다. 1468년에 생원시에 들고, 다음 해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들었다.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지고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한글소설인 〈홍길동전〉보다 무려 100여 년이 앞서는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다. 이 소설은 패관소설의 유형으로 그 내용이 윤회화복(輪廻禍福)으로 왕명에 의해 소각되었다가 지난 1998년도에 괴산에 있는 성주이씨 문중문고에서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 조선중기 문신)의 〈묵재일기〉낱장 속 면에서 필사본으로 총 13쪽 3,472자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하여 필화(筆禍)를 입고 만년에 함창 이안에 살면서 1509년에 쾌재정을 지어 휴양처로 삼았다. 이 곳은 당대에 이미 문명을 얻은 이행(李荇)과 황여헌(黃汝獻)의 창작처가 되기도 하였다. 난세에 진퇴가 분명하였던 직신(直臣)으로 시문(詩文)인 〈독학부(獨鶴賻)〉를 비롯해 7율(律) 2수와 〈지락헌기(至樂軒記)〉, 〈유송도록(遊松都錄)〉 등의 산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올랐다.
2) 1500년대의 상산 4노가(商山四老家)
상산의 4로가(商山四老家)는 후계(后溪) 김범(金範)이 시(詩)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가 지은 『후계선생문집(后溪先生文集)』권1의 ‘억김정보(億金精甫)’ 시에서,
“화길(和吉, 서대 김충의 字)과 광초(光初, 류진의 字)와 덕용(德容, 김범의 字)이 함께 동국에서 태어난 걸 하늘께 감사하네. 만일에 정보(精甫, 김언건의 字)로 하여금 이 가회(佳會)에 참석하게 하였다면, 사람들이 상산(商山)의 4노가(四老家)가 모였다 하리
라고 하였으니, 이 당시에 상산의 4로는 김충(金冲), 류진(柳震), 김범(金範), 김언건(金彦健)을 일컬었다.(권태을, 『상주한문학』에서 발췌)
① 서대(西臺) 김충(金冲, 1513∼1572)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화길(和吉), 호는 서대(西臺)이다. 성균관 전적 옹(顒)의 아들로, 1515년 별시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司成)에 올랐다. 장원급제로 인하여 여러 학사들이 재능을 시험하였으나 시(詩)로써 결국 재능을 인정받았다. 벼슬은 호조정랑, 사성, 선공감 정에 올랐다.
성격이 강직하여 남에게 이부(移赴)하지 않았다. 만년에 서대(西臺, 상주 남보천 근방) 초당(草堂)에 머물면서 시를 읊었다. 효곡서원에 제향되고, 문집으로《서대이문록》이 있다.
② 류진(柳震,, 생몰년 미상)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광초(光初). 선무랑(先務郞) 수철(壽鐵)의 아들로, 상주에 살았다. 1549년(명종 4) 기유(己酉) 식년시에 진사(2등, 12위) 급제하였다. 후계 김범(金範)의 ‘억 김정보(언건)[億金精甫(彦健)]’ 시에 상산 4로가(四老家)로 소개되어 있다.
③ 후계(后溪) 김범(金範, 1512∼1566)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 또는 동계(桐溪)이다. 진사시에 장원을 하니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극찬하였고,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조정의 부름을 받은 징사(徵士)로 옥과현감(玉果縣監, 전남 곡성군)이 되었다가 순직하였다.
특히, 영천(靈川) 신잠(申潛)목사를 도와 도곡(道谷) 석문(石門) 수양(首陽) 노곡(魯谷) 수선(修善)서당 등 상주에 18개소의 서당을 각 고을마다 세울 때 흥학육영(興學育英)을 자임(自任)한 대 교육자요, 출천(出天)한 효자였다.
④ 운정(芸亭) 김언건(金彦健, 1511∼157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정보(精甫), 호는 운정(芸亭)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자(滋)이다. 진사(進士)로 1540년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은거하며 농사에 힘쓰는 한편,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한 효우출천(孝友出天)한 선비였다. 1624년(인조 2) 효행으로 읍인이 정표(旌表)할 것을 청하므로 그에게 감찰을 증직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행장(行狀)을 썼으며, 노수신(盧守愼), 임훈(林薰) 등과 교유하였다. 지천동 연악서원(淵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운정유집》이 있다.
3) 관각 3걸(館閣三傑)
관각(館閣)이란 홍문관, 예문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관각 당상(館閣堂上)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장소인 춘추관(春秋館)을 임시로 부르던 칭호이다.
고려 일대의 문풍을 지배한 사장학의 조류 아래서 관각의 문신들은 시문이라는 기예를 통해 특출한 지위를 향유하였다. 외환이 잦았던 고려 시대에, 외교 문서의 작성 및 강대국 사신에 대한 접빈을 위해서는 문학 특히, 시에 대한 교양과 창작 능력이 필수적인 조건이었고, 이러한 기능을 갖춘 관각 문신들의 위상은 자연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관각 문신들은 정치․문화 엘리트로서 강한 자긍심을 가졌던 집단이었다.
관각 3걸은 소재 노수신(盧守愼, 1515∼1590),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과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이다.
①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탄수 이연경(李延慶, 장인)의 문인으로 1541년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연달아 장원(초시⋅회시⋅전시)하여 삼괴선생(三魁先生)이라 불렀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1547년 을사사화 때에 소윤 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되고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19년 간의 유배기간동안 학문이 크게 성취되어 성리학 뿐만 아니라 양명학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 등과 주자(朱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으며, 진백(陳伯)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註解)하였다. 시(詩)가 『증보해동시선(增補海東詩選)』과 『상산지(商山誌)』에 소개되어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다. 또한 선생은 정사룡(鄭士龍)⋅황정욱(黃廷彧) 등과 관각삼걸(館閣三傑)로 불리었다.
상주의 도남서원과 화서 봉산서원, 충주의 팔봉서원, 괴산의 화강서원 및 진도 봉암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에서 문간공(文簡公)으로 개시되었다.
저서에는 『시강록(侍講錄)』과 『소재집(穌齋集)』 13권 8책이 있다. 화서면 사산리에는 불천위 사당이 있다.
②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전기의 문신·문인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아버지는 부사 정광보(鄭光輔)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중종 11) 황해도 도사로서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1534년(중종 29)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예조판서⋅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대제학이 됐으나 1558년(명종 13)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됐다. 이어서 다시 공조판서가 됐다가, 판중추부사에 전임됐다. 이듬해에 사화를 일으켰던 이량(李樑)의 일당으로 지목돼 삭탈관직 당했다.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중국에 다녀와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으며, 『호음잡고(湖陰雜稿)』등이 있다.
③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1532∼1607)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 호는 지천(芝川). 아버지는 부호군 열(悅)이다.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던 종계변무에 성공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호조판서로 승진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하여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의 모반으로 임해군(臨海君)·순화군과 함께 안변(安邊)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낼 항복 권유문을 쓰라고 강요받았다. 이에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아들 혁(赫)이 이를 대신 썼다. 이듬해 항복권유문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풀려났다. 문장·시·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시는 독창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지천집〉이 있다. 뒤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3) 1600년대 상산 3노(商山三老)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주는 문향으로서 일대 중흥기를 맞았다. 미중유의 임란을 겪고 난 후에 향촌사회의 미풍순화와 민풍의 교화에 뜻을 두고 가장 활발한 문학활동을 한 시기이다. 동파 소식의 적벽유를 상주의 낙동강에서 실질적으로 재현하면서 적벽부에 버금가는 선비가 상산에도 있음을 자부하였다. 『상주지』에 의하면, 이 시기에 우복 정경세와 창석 이준, 사서 전식을 일컬고 있다.
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이며, 상주가 낳은 대유(大儒)이다. 본관은 진양(晉陽, 晉州), 자는 경임(景任), 우복은 호이다. 여관(汝寬)의 아들. 서애 류성룡의 문하생으로, 1582년 진사시에 1등(2위)하였고,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을과 2위)하였다. 벼슬은 이조판서에 오르고 시호는 문장공(文莊公)이다.
당대에 창석(蒼石)과 쌍벽을 이룬 대 선비로 유학사에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더불어 예학의 1인자였다. 성리학에도 독자적인 견해를 지녔으며, 특히 노론의 거유(巨儒)인 송준길(宋浚吉)을 사위로 맞아 상주에 율곡설(栗谷說)이 자리를 잡는 특이한 영향력도 미쳤다.
조선 최초의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을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한 낙사계의 합계(1599)와 영남 제1의 수학궁(首學宮)인 도남서원(道南書院)의 창설(1606)에 주축을 이루었다. 임란때에는 창의(倡義)하여 선무원종공신록권 1등에 책록되었다.
우산동천(愚山洞天)에 계정(溪亭)을 짓고 독서하였다. 상주의 학문, 교육, 문학의 질적 향상과 향풍쇄신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②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창석은 호이다. 서애 류성룡의 고제(高弟)로, 1582년 생원, 1591년 별시 문과에 급제(병과 5위)하여 부제학에 올랐다. 9세에 석천(石川) 김각(金覺)의 문하에 수학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학을 전수하여 퇴계의 도학연원(道學淵源)을 얻은 학자로 칭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주로 경연관을 겸하였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임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공의 부음을 접한 인조(仁祖)는 “영남 중 내가 믿고 의지하는 자 3인이러니 정경세, 이준, 동계(桐溪) 정온(鄭溫)이었는데, 이준이 이제 죽다니 내 다시는 가언(嘉言) 격론(格論)을 못 듣게 되었다”고 정온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다. 향토지인 『상산지(商山誌)』를 최초로 편찬(1617)하였고, 우복과 더불어 도남서원, 존애원, 낙사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형제간의 우애의 극치인 〈월간창석형제급란도(도 유형문화재 217호)〉를 남겼다. 상주의 문단사에 특기할 만한 연악문회(淵嶽文會)를 개최하여 상산 최초의 공동시집인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의 서문(序文)과 대(代)를 이은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 1622)를 누가(累加) 기록토록 하여 1778년까지(1607년 포함) 171년간 총 8회에 걸친 기록은 문향의 고장이 곧 상주임을 드러내었다.
③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사서는 호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여림(汝霖 )의 아들로 서애 류성룡과 여헌 장현광의 문하생으로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을, 1642년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올랐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특히, 조선 사신으로는 명나라에 마지막으로 다녀 온 신하로, 망해 가는 명 조정에 사신의 임무를 다하니 명사(明史)에도 “조선 사신 전식 항해래조(朝鮮使臣 全湜 航海來朝)”라고 특서하였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휴양하며, 흥학육영과 향풍쇄신에 앞장 서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옥천의 목담서원에 제향되었고,『증보해동시선』에 시가 실렸다.
4) 임란 후의 상산 4호(商山四皓)
미증유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상주의 선비들은 국가를 위해 창의 거병하였다. 7년 여 전쟁이 끝나자 이내 자율적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조선조 전국 최초로 사설 의료국을 개설하면서, 흐트러진 민풍을 쇄신시키고 후진 양성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상산 4호는 흥양 이씨의 쌍봉(이전, 이준)과 남계 강응철, 우복 정경세였다.(상주지)
①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
조선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齋). 월간은 호이다. 수인(壽仁)의 아들이고 준(埈)의 형이다. 동생과 함께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문을 배웠다. 1603년(선조 36) 식년시 생원 3등(27위)으로 들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인조때 지례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사퇴하였다.
체화당(棣華堂)에 우거하면서 우복 정경세와 검간 조정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특히, 백화산에서 피난 중 거동을 못하는 동생을 업고 산 정상으로 피하여 화를 면한 내용을 그린 《형제급란도(도 유형문화재 217호)》를 남겼다. 외남면 옥성서원에 배향되었다.
②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 앞의 단락. 생략
③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1562∼1635)
조선중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이다. 1590년 증광시에 진사(2등)에 들었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고향(양촌동)으로 들어와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특히, 1622. 5. 25∼5. 29일까지 4박 5일간 연악서원에서 상주목사 조찬한(趙纘韓, 재임 1621∼1623)을 비롯한 상산의 대표 선비인 우복, 창석 등 15명이 연악문회를 주선하였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상주 최초의 공동 시집인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이다. 지천동의 연악서원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 『남계문집』이 있다.
④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 앞의 단락. 생략
6) 낙강범월명첩(1622년)의 상산 4호
1622년 5월에 4박 5일간이나 연악동(현, 지천동)에서 목사 조찬한 등 상산 선비 15명을 남계 강응철이 주선하여 연악문회록을 개최한 것에 힘입어, 그 후 7월에 접어들자, 1082(임술)년에 중국의 적벽강에서 7월 16일, 동파 소식이 뱃놀이(적벽유)를 하면서 남긴 시집을『적벽부』라 하는데, 이는 당대 최고의 시(詩)로 추앙받아 왔다.
이에 540년이 지난 9돌 임술년을 맞아 상주 선비 23명이 이에 뒤질세라 낙동강에 모여 1622년 7.16일부터 1박 2일간 뱃놀이 시회(범주시회, 泛舟詩會)를 하고 남긴 시집이 『낙강범월록』이다. 이 때 진나라 말기의 상산 4호를 연상하면서 상주의 상산 4호를 일컬었다.(권태을, 낙강범월시)
검간(黔澗) 조정(趙靖), 월간(月澗) 이전(李㙉). 창석(蒼石) 이준(李埈), 사서(沙西) 전식(全湜)이다.
①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2∼1636)
조선중기의 선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仲)이며 검간은 호이다. 광헌(光憲)의 아들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사사하였고, 1603년에 사마시에, 1605년 증광문과(병과 21위)에 급제하여 봉상시정(정3품, 당상)에 올랐다.
낙동면 승곡리에는 선생의 연거소로서 양오진(養吾眞)의 뜻을 취하여 당명(堂名)으로 삼은 양진당(養眞堂)이 있다. 당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1975.12.30)로 지정되었다가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평가되어 2008. 7. 10일에 보물 제1568호로 승격되었다.
②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 : 앞의 단락. 생략
③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 앞의 단락. 생략
④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 : 앞의 단락. 생략
7) 영남 문장 4대가(1650∼1700년초)
낙동강에서 이미 범주유(泛舟遊)를 하면서 시회(詩會)를 경험하였다. 이 무렵에는 상주에서 문학 활동이 매우 왕성한 시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인조반정 후 남인(南人)에게는 벼슬길이 막혀 대다수 선비들이 향리에 머물렀다고는 하나, 상산의 선비들은 경학(經學), 예학(禮學)을 중시하고 가학(家學)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다음의 4분은 상주 4문장이 부족하여 영남의 4문장가들로서 상주는 선비의 고장임을 굳건히 이어온 시기이다.(상주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창석(蒼石) 이준(李埈),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이다.
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 앞의 단락. 생략
②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는 문정공(文貞公). 행 삼척도호부사 희참(希參)의 아들이며,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67년 식년문과 병과(1위)로 급제하였다. 병조판서, 한성부 좌윤, 혜민서 제조를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동인이면서 서인인 이이(李珥)를 두둔할 정도로 선학(先學)을 존경했으며, 〈천군전류(天君傳類) : 조식의 신명사도(神明舍圖) 해설서〉의 가전체를 처음으로 썼다. 청주의 봉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③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 앞의 단락. 생략
④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부계(缶溪, 부림).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이다. 대사간 홍호(洪鎬)의 아들로 가학을 전수하였다. 어려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배웠다. 1654년(효종 5) 진사(2등, 18위)가 되었으며,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했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된 후, 경연(經筵)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했으나, 효종에게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가 서인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다음 해에 파직 당했다. 1658년 경성판관으로 복귀하고 제1차 예송(禮訟) 때 송시열(宋時烈)의 기년복론(朞年服論)을 공격하고 윤휴(尹鑴)의 3년 복론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자 1660년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풀려 났으나 복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삼택재를 짓고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예송때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좌랑·사간을 역임했다.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었으며,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 〈주역구결〉·〈의례고증〉·〈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국통감제강 東國通鑑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 經書解義〉 등이 있다.
8) 조선 후기 상산 3로
1700년대 초기에는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가 실천유학을 궁행(躬行)한 성리학자이면서, 실심실학을 창도한 실학자로서 조선 정신을 문학의 도(道)로 삼은 큰 선비였다. 중기에 들어, 상산 사림의 사표(師表)로서는 구당 조목수, 입재 정종로, 손재 남한조로서 이들은 벼슬보다는 가학을 통한 학문의 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권태을, 상주 한문학)
구당 조목수, 입재 정종로, 손재 남한조이다.
①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 1736∼1807)
본관은 풍양(豊壤). 초명은 호연(虎然)으로 자는 사위(士威), 구당은 호이다. 검간(黔澗)의 후예이고,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의 현손이며, 존성재(存省齋) 석우(錫愚)의 아들이다. 조부 중애공(中厓公)에게 수학하였는데, 일찍이 영특하여 가문을 빛낼 아이로 지목되었다. 장천의 오작당(悟昨堂)에서 학문과 육영으로 선비의 도를 삼았다. 아우 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 1739∼1823)와 당숙인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 1724∼1779)을 모시고 향풍쇄신과 제자를 가르치되, “책을 끼고 오는 자질은 물론 원근․친소를 가리지 않고 훈회(訓誨)함이 한결같아 반드시 덕행(德行)을 먼저 하고 문예(文藝)는 뒤로 하였다.”(柳尋春, 行狀)고 한다. 매사에 성경(誠敬)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가르쳤으며, 초학자 교육용으로 중용의 난해처(難解處)를 골라 14조목(條目)의 『강해록(講解錄)』을 내었는데 당시 중용 공부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시보다는 산문(散文)이 많으며, 특히 학문과 문학의 지향점과 선비의 이상이 무엇인지 일깨웠다. 우산(愚山)의 입재(立齋)․두릉(杜陵)의 손재(損齋)와 더불어 당대 상산 3로(商山三老)로 칭하였다. 시문집으로 『구당공고(舊堂公稿)』가 있으며,『상산지』를 찬술하였다.
②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앙(士仰), 입재는 호이다. 우복 정경세의 7세손이며,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의 현손이다. 태어나 4일 만에 모친을 여의고 외조모 품에서 자랐다. 평생을 흥학육영(興學育英)하여 상주교육사에 대서 특필할 만한 종사(宗師)다. 1789년 채제공(蔡齊恭)이 경학문장(經學文章)으로 산남(山南) 제일(第一)로 천거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당대 영남 굴지의 도서관이 된 우산서재(愚山書齋, 대산루 - 장서 만 권)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797년에 강릉현감에 이어 함창현감에 제수되었다. 그 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왔으나 뒤에도 사헌부 지평, 장령의 직함이 내려오기도 하였다. 다음 해에 도남서원 훈장을, 1807년에는 도백(道伯, 관찰사)이 빈(賓)으로 초빙하여 향음주례를 행함에 영남 선비 수천 명이 모이기도 하였다.
입재는 퇴계(退溪)․서애(西厓)․우복(愚伏)으로 이어지는 학통으로, 우산학파(愚山學派)를 형성했으며 당대 영남의 유종(儒宗)으로서 류심춘(柳尋春)․이승배(李升培)․류태좌(柳台佐)․이원조(李源祚) 등 248명의 제자를 길러 냈다.
③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1744∼1809)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종백(宗伯), 손재는 호이다. 군수 남영(南嶸)의 후예이며, 필용(必容)의 아들이다. 약관에 이미 선비의 기본을 갖추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입재(立齋) 정종로와 상주 유학의 쌍벽을 이룬 영남의 큰 선비였다. 특히 산수를 사랑하여 많은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문경의 선유동(仙遊洞)에 옥하정(玉霞亭)을 지어놓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금강산 유상에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묘소는 외서면 연봉리에 있다.
9) 19세기 초 영남의 4문장가
상산 선비의 전통은 계속 맥을 이어나갔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가학을 이으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과 문학으로 일생을 마치기도 하였다. 곡구(谷口) 정상관(鄭象觀)의 『곡구원기(谷口園記) 권 10』「행장․광명(壙銘)」에서, “영남의 선비들이 군(황인로)과 정숙우(정상관), 강계호(강세은)를 3문장(三文章)이라 지목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여기에 백하(황반로)를 더하여 영남의 4문장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곡구원기(谷口園記』권 10>에서, “일시의 문장 재걸은 각기 지닌바 특장이 있는데, 백하(황반로)의 문장은 화미(華美, 화려하고 아름다움)하고, 곡구(정상관)의 문장은 웅건(雄建, 웅대하고 건실함)하며, 과암(강세은)의 문장은 초발(峭拔, 높고 뛰어남)하고, 우평(황인로)의 문장은 전섬(典贍, 전아하고 넉넉함)하다”라고 평하였다.(권태을, 『상주 한문학)
① 우평(雨坪) 황인로(黃麟老, 1785∼183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문길(文吉), 우평은 호이다. 반간(槃澗) 황뉴(黃紐)의 후예이며, 경희(敬熙)의 아들이다. 백하(白下) 황반로(黃磻老)와 쌍벽을 이룬 시인이며, 학자로서 문장이 고고(高古)하고 박식하였다.
시문(詩文)은 경전에서 체득한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온아(溫雅)함을 귀히 여겼다. 『곡구원기(谷口園記』권 10>에서, “일시의 문장 재걸은 각기 지닌바 특장이 있는데, 우평(황인로)의 문장은 전섬(典贍, 전아하고 넉넉함)하다”라고 하였다.
② 곡구(谷口) 정상관(鄭象觀, 1776∼1820)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무(叔毋)․숙옹(叔顒), 곡구는 호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아들이다.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문인으로서,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우복(愚伏) 이래로 전수된 가학을 독실히 계승하였다. 천부적인 문학적 자질을 타고나, 당대에 이미 영남의 3문장 또는 4문장으로 문명을 얻었으며, 문장작법이 고문파의 성격을 취했다.
곡구의 학문은 전적으로 생부인 입재로부터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입재의 학문·문학·도덕·사회관·인생관 등을 총망라하여 일생의 행적 중 200일화(逸話)를 엮어 입재유사(立齋遺事)를 찬술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곡구는 시문에 다 능한 영남 4문장의 한 사람으로, 시는 74제(題)나 174운(韻)에 이르는 시를 비롯하여 한 제목 밑에 여러 수를 쓴 경우가 많다. 또한, 명(銘)·부(賦)를 비롯하여 서(序)·기(記)·잡저(雜著) 등에도 독특한 작품이 많다.
특히, 선생은 『곡구원기(谷口園記』권 10>에서, “일시의 문장 재걸은 각기 지닌바 특장이 있는데, 곡구(정상관)의 문장은 웅건(雄建, 운대하고 건실함)하다”라고 평하였다.
③ 과암(過庵) 강세은(姜世誾, 1780∼183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호(啓好), 과암은 호이다. 고조는 소리(素履) 강작(姜작)이고, 조부는 시북(市北) 강항(姜杭)이며, 부는 통덕랑 필장(必章)이다. 1803년 증광시 생원 3등(65위)에 들어, 참봉으로 출사하여 감역관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서 학문과 문학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장가의 집안에 태어나 천부적인 문학적 자질을 지니고 기품이 높았으나 성격 탓에 벼슬길을 포기했다. 『곡구원기(谷口園記』권 10에서, “일시의 문장 재걸은 각기 지닌바 특장이 있는데, 과암(강세은)의 문장은 초발(峭拔, 높고 뛰어남)하다” 고 하였다.
대표적인 시로, 농민의 고충을 살핀 40구(句)의 <민우(悶雨, 권7)> 등이 있다.
④ 백하(白下) 황반로(黃磻老, 1766∼184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숙황(叔璜), 백하는 호이다. 방촌(厖村)의 후예이며, 심기당(審幾堂) 계희(啓熙)의 아들이다. 선조인 축옹 황효헌, 반간 황뉴, 심기당으로 전수된 도학과 문학을 집대성하여 당대에 영남 4문장가로 문명을 얻었다. 1789년 식년시 생원 2등(14위)에 들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곡구원기(谷口園記)』권 10>에서, “일시의 문장 재걸은 각기 지닌바 특장이 있는데, 백하의 문장은 화미(華美, 화려하고 아름다움)하다고 평하였다.
Ⅴ. 마무리 하면서
이상에서, 상산 4호(商山四晧)의 유래부터 우리 지역에서도 이에 버금가는 큰 선비들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물론 여기에서는 더 훌륭하고 뛰어난 인물들이 더 있으며, 당대에 4호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선비들도 있었다. 혹여 해당 문중에서 섭섭해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며 아울러 양해 말씀을 올린다.
특히,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특출한 분으로, 조선조 최초의 화왕계계 소설인 『화왕전(花王傳)』을 지은 졸재(拙齋) 채소권(蔡紹權, 1480∼1547), 서애의 제 3자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6)은 37세때 상주로 이거하여 상주의 학문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실심실학을 창도하고, 한글을 언문(諺文)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토 답사 기행문과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룬룬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 영남 최초의 시평집(詩評集)인 『창해시안(滄海詩眼)』을 저술한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 1750∼1821)도 벼슬에는 관심없이 문학에 한 평생을 바친 선비이며, 상주의 유도(儒道)를 부호(扶護)하는 데 생애를 바치고 마침내 321명의 제자를 길러낸 영남학파 최후의 보루(堡壘)였던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 등은 당대에 제 1인자들이었다.
최근 들어 전통문화 연구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특히, 상주문화원(원장 김철수)에서 추진하는 금요사랑방은 매우 훌륭한 향토사 교육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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