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6권

구비(口碑)에 오른 추담(秋潭) 고유(高裕)의 선정(善政)

빛마당 2019. 4. 4. 20:27

* 이 글은 상주문화원이 발간한 상주의 인물 제6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재합니다. 스크랩을 하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구비(口碑)에 오른 추담(秋潭) 고유(高裕)의 선정(善政)

權 泰 乙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매체로 석비(石碑)·지비(紙碑)·구비(口碑)가 있다. 추담(秋潭) 고유(高裕)의 선정(善政)은 가장 오래 갈 구비에 올랐다. 예부터, ‘이름을 하필이면 돌덩이에 새기랴, 길가는 행인의 입이 비석과 같거늘.’이라 한 말이 있다. 추담도 구비가 가장 생명이 긴 비석임을, 단종의 숙부로 그 조카의 복위를 꾀하다가 형인 세조에게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사당에서 쓴 시에서, “높은 명성은 백세에 구비(口碑)로 전하네.” ≪秋潭先生文集≫(권1), <詩·題錦城大君祠堂>.“高名百世口中碑”
라고 하였다. 과연, 청덕(淸德) 애민(愛民)의 추담(秋潭) 선정(善政)은 구비(口碑)에 올랐다.

○ 가계(家系)
  추담(秋潭) 고유(高裕·1722~1779)의 자는 순지(順之)요 관향은 개성이다. 시조는 고려 판도판서 영(英)이요, 7대조는 문과급제로 군수에 이른 흥운(興雲)이며, 6대조는 문과급제로 성균 사예에 오르고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된 월봉(月峰) 고인계(高仁繼)선생이다. 증조는 선교랑 한익(漢翊)이요 조는 사석(師錫)으로 문행(文行)이 있었다. 아버지 규서(奎瑞)는 단아한 선비로 일컬어졌으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서계(西溪) 담수(聃壽)의 후예다. 추담은, 1722년 1월 25일 상주 의곡(蟻谷)에서 태어나 1779년 7월 27일에 별세하였다. 배위는 축산 전씨(竺山全氏) 좌랑 전광제(全光濟)의 따님인데 혈육이 없고 계배(繼配)는 순천 김씨(順天金氏) 군수 김성흠(金聖欽)의 따님으로 아들 몽린(夢鱗)과 몽근(夢根)을 두어 추담정신(秋潭精神)을 이어갔다.

○ 인품과 재능
   ∙ 관용과 슬기 - 일화 다섯 -
  6세에 집안의 계집종이 도둑질하는 것을 보았다. 옆엣 사람이 잡으려 하자, “그리하면 그의 나쁜 점을 폭로하는 것이니, 그가 스스로 깨달아 달아나게 하는 이만 못하다.”하고, 인기척을 내어 달아나게 하였다.
  7세에 예천 화장리의 냇가 상류에서 뭇 아이들이 소나무를 꺾어 땔감을 해 놓고도 지고 가지 못함을 보고, 한데 묶어 냇물에 띄워 하류에서 기다렸다가 건져 노놔 가지지 않는가 하였다.
  밤에 어떤 이가 눈을 부라리고 다가옴을 보고 추담이 자신을 시험하는 줄 알고, “내 이미 알고 있는데 네가 감히 이러느냐.”하며 태연하였다.
  일찍이, 문경 희양산 밑에 만년에 은거할 생각으로 밭을 사서 친구에게 관리토록 하였더니, 그가 몰래 팔아버렸다. 이 사실을 안 추담이 문서를 불사르고 벗을 대함이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젊어서 공부할 때 밤에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왔으나 사리로 나무라고 물리쳤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 효우 - 일화 둘 -
  7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슬퍼함이 어른같고, 부친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20세(1741) 때 부친의 병환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데 꿈에 어떤 이가 와서,“걱정하지 마라, 약이 곧 이를 것이다.”하여 깨었는데, 아침에 우연히 우황(牛黃)을 주는 이가 있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이 곧 나았다. 그러나, 이 때에 추담 자신은 배에 종기가 난 것을 돌보지 않아 곪아서 옷과 띠에 고름이 엉겼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누이와 누이동생이 끼니를 잇지 못함을 알고, 두 집 식구를 자기 집 가까이 두고 먹고 굶음을 같이 나누었다. 곡식이 익을 무렵이면 세(본가·누이·누이동생) 집에서 서로 베어가서 남들은 누가 주인인 줄도 몰랐다.

   ∙ 특출한 재능과 식견
  8세에 진시황 금인론(始皇金人論) ≪十八史略≫, 진시황 17년에 보면, 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천하의 병기(兵器)를 함양(수도)으로 다 모으게 하고, 녹여서 종(鍾)걸이 대(臺)를 고이는 기둥으로 금인(金人·銅像) 12개를 만들었는데 하나의 무게가 천 석(石·一石 820근)이었다 함.
을 지으니, 증조부 개암공(介庵公)이,“우리 문호를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이다.”라고 하였다. 금인론(金人論)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으나, 진시황 스스로는 병기(兵器)로써 천하를 통일하고서 천하가 통일되자 천하의 병기를 함양(수도)으로 들이게 함으로써 백성을 약체로 만들려 한 음흉한 꾀를 비판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16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9세에 입춘시(立春詩)를 지었는데,

禹陰當惜(우음당석)  우(禹) 임금같이 촌음(寸陰) 촌음(寸陰)은 곧 짧은 시간. 우왕이 13년 간 치수사업에 열중하여 시간을 아끼느라,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다 함.
도 아끼고
湯盤是浴(탕반시욕)  탕(湯) 임금 욕탕 탕임금 옥탕 곧 탕반(湯盤)은, 탕왕이 명(銘)을 새겨 경계를 삼은 목욕통. ≪禮記·大學≫.“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란 말이 있다. 날로 날로 자신을 새롭게 수양해 감의‘日新’이란 말이 이에서 유래함.
에서 씻듯 날로 새롭게 하리.

라고 하였다.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청대 권상일(1679~1760)은 상주 출신의 성리학자요 문신임.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당대 영남학파의 주축이었다.
이 이 시를 보고 “후세에 전할 글”이라고 칭찬하였다. 이같이 특출한 재능과 식견으로 학업을 닦아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1세에 왕이 친히 보인 성균유생 제술과(製述科)에 장원하였는데 왕이 시험장에서 추담의 단정한 용모와 공경스러운 거동을 눈여겨 보았다가 장원으로 입시하니 왕(영조)이 추담의 손을 잡고,“그대가 그 사람이로구나.”하고 또 당시의 정사(政事)에 대하여 묻자 조목조목 왕의 뜻에 맞게 대답하여 이때부터 추담은 영조의 머릿속에 기대되는 선비로 남게 되었다. 위의 말은, ≪秋潭集≫(권4), <附錄·行狀>(鄭宗魯찬)의 말.


○ 의로(義路)가 막힌 벼슬길
  1743년(癸亥·영조 19) 정시문과 급제로 승문원에 보직되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기이하게도 추담의 벼슬길에 희비가 엇갈렸으니 그 하나는 변함없이 왕은 추담을 크게 등용하고자 함이요 다른 하나는 추담의 진로를 가는 곳마다 막으려 한 당시의 세도가가 있음이었다. 1744년 당후(堂后·정7품 注書)로서 입시하는데 한 재상이 붓을 빌리고자 하였다. 추담이 거절하자 재상이 강압적으로 요구함에, “이 붓은 사관(史官)이 아니면 쓸 수 없다!” 라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는, 승정원 주서가 비록 하관(下官)이나 춘추관 기사관을 당연직으로 겸임하여 사초(史草)의 기록이나 실록편찬에 참여하는 청요직(淸要職)의 일원이란 긍지와 사명감을 다 지키려 함에서였다. 또 하루는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 아버지)이 문에 버티고 앉아 사람이 지나지 못하게 하자 추담이, “상공께서 요직에 앉아 후진들을 막고자 하십니까?” 하니, 홍공이 사과하고 피하였다 한다. 지극히 당연한 두 처사다. 그러나, 추담을 보는 이로 왕은 바르다 여겼을 것이요, 혹자는 눈엣가시로 여겼을 것이다.
  1746년 중시(重試)에 나아갈 때 어떤 이가 요직에 있는 재상의 뜻으로 추담에게 와서 말하기를,“만일 와서 보면 마땅히 유력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전하자 추담이,“선비로 요로(要路)에 붙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기가 꺾이어 물러갔다. 자기 사람을 만들려던 재상이 보복이 어떠했을까는 상상이 가능하다. 특명으로 연원승(連原丞) 찰방(종6품)이 되어서는 상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역(驛)에 들어오는 세금의 반을 경감하여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1747년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으로 승격하고 사관을 겸하여 입시하니 왕이 곁의 신하에게,“고모(高某)는 약관의 나이로 벼슬하여 문학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급제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1753년(영조 29)에는 특명으로 경상도 도사(都事·종5품)가 되었다. 도내 전답의 세금을 조사하는데 장부가 산더미같아 추담을 보내었는데 시비를 가려 물흐르듯 처결하고 송사(訟事)에 추호도 부정이 없으니 관찰사 윤동탁(재임·1752~1753.11)이 감탄하여,“어찌 그리도 귀신과 같은가!”라고 하였다.
  1754년(영조 30) 병조좌랑(정6품)으로 사관을 겸하여 입시하니 왕이 또,“내 한 번 그대를 등용하려 하였더니, 지금 등과한 지 10년이구먼”하고 추담이 과거에 응시하여 지은 몇 구절을 외며,“내 지금껏 잊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로써도, 왕이 신하의 재능을 인정하여 크게 등용하려 했던 인재가 10년이 지나도 겨우 정6품직에 머물러 있었던 사실이 추담의 벼슬길에는 의로(義路)가 막혔음을 알 수 있다.
  1757년(영조 33) 특명으로 창녕현감(종6품)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조야에 추담의 치적(治績)이 널리 알려졌다.(뒤에 상론)
  1765년(영조 41) 지평(종5품)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사직 상소를 올리었다. 상소의 대요는 첫째, 대본(大本)을 세워서 극치(極治)를 이루고 둘째, 간쟁(諫爭)을 용납하여 언로(言路)를 열며 셋째, 많은 선비를 예우하여 태학(太學·성균관)을 중히 여길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영조가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진달한 세 가지 조목에 그 첫째는 나에게 약석(藥石)이니 힘쓰지 않겠는가. 두 번째는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도다. 만약 흡수하는 도량이 있었다면 어찌 바른 말하는 기풍이 없겠는가. 세 번째는 내 이미 부지런히 부식(扶植)하는 노력이 없었으니, 선비들이 어찌 어진 사람이 많은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내가 그대의 소장을 보니 부끄러워지는구나. 어찌 지난 일이라 소홀이 하겠는가, 마땅히 더욱 힘쓰겠노라.” ≪추담집≫(권4), <부록·행장>(정종로 찬)


라고 하였다. 영조가 추담을 신임함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게 한다. 이듬해(1766) 장령(정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자 왕이,“일찍 보아하니 고유는 수염이 없더니, 지금 내 나이 80이 다 되도록 아직 다시 보지 못하였으니 그가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구나. 영남인(嶺南人)의 고집을 내 아름답게 여기노라. 군신(君臣) 간의 분수는 천지간에 피할 수 없는데 저번에 도중에서 돌아가니 매우 한심하였다. 그가 만건(慢謇)함에 맡길 수 없어 특별히 파직의 임명만 베풀 뿐이로다.” 위와 같은 곳.
라 하고, 곧 이어 장악원 정(정3품 당하관)의 벼슬을 내리었다.
  1767년(영조 43)에 또 장령(정4품)을 내려 입시하니 왕이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상신(相臣) 서지수(徐志修)를 돌아보며,“이 사람이 늙었는가? 내 눈이 어두워 분별하지 못하겠도다”하고 탄식하기를,“내 그대를 안 지 어느덧 이십년이도다!”라고 하였다. 성균관 유생을 친히 시험 보일 때(1742) 장원을 한 인재(고유)를 한결같이 크게 등용하려 했던 뜻을 지녀온 지 20여 년(1767), 왕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던 인사정책의 난맥상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고유에게 선조가 베푼 은전은 벼슬이 아니라, 그에게서 영남인의 지조를 발견하고, 국가적 인재임을 끝까지 믿었던 신뢰 그 자체였다. 추담의 벼슬길은 의로(義路)가 막힌 18세기 후반의 조선의 벼슬길이었으나, 본질적으로 추담은 국사(國士)였음에는 변함이 없다.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며 장악원 정·사복시 정(정3품 당하)을 제수하고 영조실록 낭청(郎廳)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동부승지(정3품 당상)에 승진하고 1778년(정조 2) 안주목사(정3품 당상)가 되었다. 변방의 사나운 풍속을 성신(誠信)과 효우(孝友)로 깨우쳐 얼마되지 않아 백성이 즐겨 따르게 되었다. 특히, 관부(官府)에 쌓아 둔 곡식을 훔치는 아전의 고질적 병폐를 근절하고, 관리의 녹봉이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혹 영구히 없애거나 반으로 경감시키고, 상사(上司)에게 보고하여 허호(虛戶) 8천 호를 감소하니 백성은 단비를 만난듯 하였다. 게다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만력연간 1573~1619 사이 재임) 대감이 안주목사 때 관전(官田)을 덜어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장려했던 일이 뒤로 오며 폐한 것을 추담이 예대로 수립 회복하니 백성들이 기리기를, “앞에는 이공(李公)이 있더니 뒤에는 고공(高公)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 구비설화(口碑說話)로 전승되는 명관 고창녕(高昌寧)
  추담(秋潭)이 창녕현감이 된 것은 36세 때인 1757년(영조 33) 1월이었다. 부임하니 노회한 아전들이 젊은 현감을 얕보고 사리사욕 채우기에만 바빴다. 하루는 저들에게 다 자란 수숫대 한 개씩을 꺾어오게 하여 통째로 소매속에 넣도록 명하였다. 어떤 아전도 명을 따르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원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추담이,“네 이놈들! 일년 자란 수숫대도 네놈들 소맷속에 들어가지 않거늘 항차 20년 자란 사람이 네놈들 농간에 움직이겠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원님의 지혜와 인품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은 아전들이 절로 순종하였다. ≪추담집≫에 없는 ≪창녕군지≫ ≪창녕군지·제13장 사화(史話)≫. 창녕군지편찬위원회, 1984.
에 실린 추담에 관한 일화로, 15·6세 때 창녕현감의 일이라 하였다. 나아가, 이 일화 첫머리에서 고유(高裕)는 본명보다도 ‘고창녕(高昌寧)’이란 별호로 널리 알려져, 노소를 막론하고 원님의 이름은 몰라도 ‘고창녕’을 모르는 이는 없다고 하였다. 위의 몇 사실만 보아도 추담은 일찍이 구비설화(口碑說話)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추담집≫의 창녕 선정 사례와 ≪창녕군지≫의 고창녕의 명재판 사례를 참조하여 몇 가지만 소개한다.

   ∙ <백성을 위함에는 상관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은 목민관>
  경상도관찰사 조엄(趙曮·재임 1758~1760)이 조창(漕倉)을 밀양에 창설하여 하도민(下道民)에게 봄에 곡식을 싣고가서 가을에 바치게 하였다. 추담이 창녕과 현풍은 수로를 이용할 수도 없이 화왕산 재를 넘어야 하는 등의 막대한 불합리성을 열여섯 가지로 들어 감사에게 편지로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감사가 끝까지 자기 주장을 양보치 않자 공이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내니 하도의 백성들이 길이 칭송하였다.(추담집·창녕군지)

   ∙ <옥천리(玉泉里)에 선 현감 고후 유 불망비(縣監高候裕不忘碑)>
  남붕(南鵬)이란 중이 권세를 끼고서 불법을 자행하였다. 어떤 수령이 이를 다스리려다 도리어 파면을 당한 뒤로는 남붕의 횡포는 날로 더하였다. 추담이 현감이 되어 곧 남붕을 옥에 가두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재상이 편지로 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추담이 답장도 않고 죄를 다스리니 협박하였으나 마침내 장살하였다.(추담집 행장·묘갈명)
  이 일화와 맥을 같이 하는 일화가 ≪추담집≫에는 없고 ≪창녕군지≫에는 남았으니, 옥천(玉泉) 처녀의 원혼을 달래준 일화다. 옥천 사는 처녀가 들일을 나갔다가 옥천사(玉泉寺) 중에게 몸을 버렸다. 처녀는 물에 투신하여 죽었으나 원통하고 분하여 혼령이 동리를 떠돌며 동민을 괴롭혔다. 귀신 소동이 현내에 번지자 현감이 현장에 나아가 엄밀히 수소문하여 옥천사 중이 겁탈한 사실을 밝히고 그 중을 사형 시켰다. 원혼도 감읍하여 물러났다고 한다.(창녕군지) 이 뒤, 현감의 명판결에 감동한 주민들이 옥천리의 관룡사로 가는 길목인 화왕산성 등반로 입구의 대로변에 불망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반으로 훼상된 채 서 있다. 아마도, 중 남붕과 옥천사 중은 동일 인물로, 사건이 난 현장에서도 다른 곳과 다르게 설화적 요소를 띄며 전승되었음을 위의 두 경우로서도 알 수 있다.

  <돈 앞에 천륜을 버린 아비 처단>
  갑(甲)의 돈을 받고 딸을 첩으로 주기로 한 을(乙)이, 혼인날 보니 갑(甲)의 얼굴이 너무 추한데다 늙었음을 보고, 딸에게 짐짓 자게 하고 갑을 살해하여 암매장하였다. 갑의 아들에게는 관광차 떠났다고 통지하였는데 몇 개월이 되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관에 민원을 넣었으나 관에서도 어떤 단서를 찾지 못하고 추담 현감에게 넘겨졌다. 바로 을(乙)을 불러 그 간특함을 밝혀 내고 시신을 찾아 아들에게 보내었다.(행장·묘갈명)

  <대(竹)를 자른 형상으로 도둑을 잡음>
  어느 상인이 주막에서 자다가 돈을 잃었는데, 아침에 대울타리를 자르고 도둑이 도망친 사실을 알고 현감에게 고발하였다. 현감이 상인에게, 주막으로 가서 대나무가 잘린 형상을 자세히 보고 오라 명하였다. 상인이 다녀와서 대나무가 잘린 뾰족한 부분이 안으로 향하였다고 아뢰었다. 현감이 바로 주막집 주인을 불러 꿇어앉히고,“어찌하여 도둑이 밖에서 대를 자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뾰족한 벤 자리가 안으로 향하였느냐?”라고 다그치자 주막집 주인이 마침내 죄를 자백하였다.(행장)

  <유덕군자(有德君子)라 감복한 왜인>
  추담이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동래부에서 왜인을 접대하게 되었다. 왜인들도 추담을 보고는, “반드시 덕(德)있는 군자다”하고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공경하였다.(행장) ‘중심이 성실하면 겉으로 드러난다.’(誠於中形於外)고 한 말이 추담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정절녀(貞節女)의 원한(寃恨)을 풀어줌>
  초계(草溪)에 사는 염씨(廉氏)의 딸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모함을 입고 관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관에서 관졸을 시켜 데리고 나가라 하니, 관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염씨녀가 칼로 잡힌 손을 자르고 끝내 죽고 말았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감사(監司)가 재판관(초계현감)을 두둔하여, “그 여자의 죽음은 정절(貞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추담도 마침 좌중에 있다가 정색을 하며, “사람이 싫어하는 일로 죽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정절이 아니면 능히 하겠습니까? 만일 공의 말대로라면 무엇으로 세상에 권장하시겠습니까?” 라고 하니, 감사가 곧 깨달았고 조정의 관리 또한 사실대로 보고하여 염씨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행장·묘갈명)

  <창녕 남지읍 칠현리(漆峴里)에 선 현감 고후 유 청덕애민선정비(縣監高候裕淸德愛民善政碑)>
  이 비는 남지읍 칠현리(옻고개)에 섰는데 동구 앞이다. 1762년(영조 38)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세웠는데 현재는 창녕향토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에 새겨진 추담의 애민(愛民) 선정(善政)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호남 전주(全州)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 박모(朴某)가 17세에 정읍의 부농가 이씨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시어머니가 강제로 쫓아냈다. 죽으려고 여드레를 굶었으나 뜻대로 도지 않아 방황 끝에 창녕현 남지 칠현(옻고개)까지 왔다가 그곳에 사는 21세 김씨남(김녕 김씨)과 재혼을 하였다. 그 뒤, 빨래터에서 사방으로 수소문 끝에 아내를 찾아 옻고개에 이른 옛 남편을 만났다. 박 여인은 과거의 정의를 생각하여 집으로 데리고 와 닭을 잡아 대접하였는데 전 남편이 즉사하였다. 청천벽력을 맞은 사람같이, 옛 남편을 죽인 살인사건이 나서 현감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문초 끝에 사건의 전말을 들은 현감이 전 남편이 먹다남은 닭고기를 개에게 주었더니 개도 즉사하였다. 현감이 주민들에게 “이 집 지붕을 벗겨라!”라고 명령하였다. 초가 지붕을 벗기자 백년 묵은 지네가 나왔다. “지네는 닭과 상극이라 이모(李某)가 죽은 것은 지네의 독 때문이다. 저 여인은 무죄다. 풀어주어라.”라고 하였다. 원님의 명판결로 목숨을 건진 박 여인이 2년 간 불철주야 길삼으로 모은 돈으로 가매장하였던 전 남편의 유골을 손수 짠 목면포(木綿布)로 고이 싸서 전주 본가로 보내었다. 수백 명의 동민들이 박 여인의 목숨을 구해 주고, 또 사람으로서 정의(情義)를 다 하도록 한 원님의 애민 청덕을 기려 남지읍 칠현리 동구 앞에 고유의 선정비를 세웠다.(창녕군지)
  오늘날까지도 창녕의 나이 많은 분들은 ‘고창녕(高昌寧)’의 애민한 명판결을 한두 가지씩은 다 알고 있다. ‘고창녕’이 누군지, 심지어 몇 살에 부임했던 현감이지는 몰라도 슬기로써 명판결을 하여 죄없이 죽을 뻔 한 약자의 목숨을 건지고, 정절(貞節)에 살고 죽은 여인의 한을 풀어준 실화는 후대로 내리며 구비(口碑)에 올라 설화적 요소를 띄기에 이르렀다. 관리로서 직위는 비록 낮았으나, 인간의 가치 실현에서는 최고로 구비(口碑)에 오른 명관이 되었다.

○ 이룬 일과 비례하는 인간의 가치
  추담(秋潭) 고유(高裕·1722~1779)는 특출한 재능과 인품을 지녀 왕으로부터도 국사(國士)적인 인재로 인정을 받은 선비다. 그러나, 의로(義路)가 끊긴 벼슬길에 올라 정의롭고자 하여 도리어 직위는 낮았지만, 이룬 일은 최상이어서 사람의 가치는, 구비(口碑)에 올라 2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창녕(高昌寧)’으로 살아있다. 끝으로, 추담이 창녕현감으로 부임하며 부상역(扶桑驛)에서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청덕(淸德)을 기린 시 ≪추담집≫(권1), <詩·扶桑口號>. 부상(扶桑)은 현 김천시 남면 소재의 옛 역으로, 부상이란 전설상 해뜨는 곳이요, 이 역의 동녘에 야은이 은거했던 금오산(金烏山)이 있는데, 금오란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 수를 첨기해 둔다.

朝騎鐵連錢(조기철련전)  아침에 검은 얼룩배기말 타고
薄暮到扶桑(박모도부상)  저물녘에 부상(扶桑)에 이르렀네.
望見金烏山(망견금오산)  멀리 금오산(金烏山) 바라보니
秀色畵彼蒼(수색화피창)  수려한 산색은 저 창공에 그린 듯하네.
峭峰削欲成(초봉삭욕성)  치솟은 봉우리는 깎아서 이룬 듯한데
危磴盤未央(위등반미앙)  가파른 비탈길 끝없이 구불구불 도네.
上有千歲松(상유천세송)  정상에는 천년 묵은 소나무가 있어
特立傲風霜(특립오풍상)  우뚝 서 풍상에 굴하지 않네.
緬憶吉注書(면억길주서)  아득히 길주서(吉注書)를 생각하니
冥冥此遯藏(명명차둔장)  세상 피해 도망쳐 이곳에 숨었었지.
巢許避帝堯(소허피제요)  소부(巢父) 허유(許由)는 요(堯)임금을 피하였고
夷齊登首陽(이제등수양)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수양산으로 올랐네.
一柱障橫波(일주장횡파)  한 지주(砥柱)가 횡행하는 물결을 막아
萬古扶綱常(만고부강상)  만고에 강상(綱常)을 부호(扶護)하였네.
高人死已久(고인사이구)  고인(高人)은 죽은 지 이미 오래이나
淸風猶不亡(청풍유불망)  청풍(淸風)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네.
懦者亦起立(나자역기립)  나약자도 벌떡 일어나
長嘯一彷徨(장소일방황)  긴 파람 불며 서성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