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236. 맞장구치기

빛마당 2009. 11. 7. 21:39

236. 맞장구치기

 홀가분하게 잎을 떨어뜨리고 선 은행나무를 봅니다. 한 순간 미련 없이 내려놓기란 쉽지 않을 터인데 오히려 칼칼한 하늘과 맞선 그 당당함이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하잘 것 없는 이해관계,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사는 보통사람으로서는 부럽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좋은 친구란 그 사람과 같이 그네에 앉아 한마디 말도 안하고 헤어지지만 마치 인생에서 최고의 대화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거니와 그렇지 못해도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호응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요.

 대인관계에서 참 중요한 요소는 대화입니다. 이런 대화를 할 때 지켜야 할 일은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호응해 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대화의 조건으로 첫 번째가 ‘경청’이고 두 번째가 ‘호응’이라고 하는 가 봅니다.

 백두산을 여행할 기회가 있어 인천에서 단동까지 배를 탔습니다. 꼬박 밤을 새워 가는 여정에 일행 중 7-8명이 둘러앉아 무료한 시간에 활기를 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누는 주제가 ‘나는 이렇게 결혼하였다’였는데 나 또한 호기심도 있었고 거기다 진행자의 재치가 재미있어 멀찌감치 앉아 귀동냥을 했습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저마다 사연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모습이 진지했습니다. 남편의 설명이 좀 미진하다 싶으면 아내가 또 곁에서 수정. 보완을 해주니 좌중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일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엮어나가는 분도 있는가 하면 도대체 초등학생이 국어책을 읽는 듯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분도 있었습니다. 만남과 결혼까지 과정도 특색이 있지만 표현하는 방법 또한 무척 개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임을 이끄는 사회자의 태도였습니다. 드라마틱한 경우는 말없이 경청만 하다가 참 멋 적게 말하는 이야기꾼 앞에서 탁월하게 분위기를 엮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자의 앞에 앉아서 연신 ‘그래서’, ‘옳지’, ‘그럼 그렇지’, ‘그리고는’ 등의 맞장구를 치는데 이 맞장구가 이야기를 쉽게 이어가게 했고 요소요소마다 조미료를 첨가하듯 지루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호응’이라 해도 좋고 판소리에서 고수가 중요한 대목마다 삽입하는 ‘추임새’라고 해도 좋을 말입니다.

 가슴에 깊이 가라앉아 빠져 나올 줄 모르는 일상의 찌꺼기들을 오늘 하루는 말끔히 비워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재미없고 지루할 망정 이 찌꺼기들을 기꺼이 맞장구치며 꺼내 줄 친구가 그리운 저녁입니다.

200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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